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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Jul 28. 2016

<환상의 빛> 단평

빛이 밝아야만 하는 이유

<아무도 모른다>(2004) 이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장편영화는 모두 챙겨보았다. 작품 순서를 욀 정도다. 나만 그런 건 아닐진대, 주변 영화 팬 중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안 좋아하는 사람 못 봤다. 따스한가 하면 한없이 서늘한 그의 시선이 배인 영화들은 여러모로 매력적이다.관객으로서 관람하기에도, 꼭꼭 씹어 리뷰를 쓰기에도, 주변 사람에게 추천하기에도 다 좋은 팔방미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 제목만 들어도 뭉클해지는 장면 몇 개는 늘 가슴에 품고 다닌다.


이토록 좋아하는 감독의 데뷔작을 보지 못했던 건 순전히 두려움 때문이었다. 정교한 미장센이 특장이라는 <환상의 빛>을 작디작은 노트북 모니터로 보고 싶진 않았다. 그랬다가 별로면 탓할 곳도 없잖은가. 재개봉 소식을 듣고 벼르다 오늘 아트나인에서 조조로 관람했다.

주인공 유미코(에스미 마키코)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목이 암시하듯 빛을 강조한 이 영화는 주로 자연광을 사용해서 명암이 무척 두드러졌다. 멀리서 잡아 인물의 윤곽만 보이는 장면도 많았고 클로즈업은 거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보다 어디서 일어나는지가 중요하다는 듯 텅빈 거리와 공간을 오래 보여줬다. 인간에게 감당하기 힘든 일이 닥쳐서 어질대도 세상은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있고, 사람은 다시 빛 같은 걸 스스로 발견해 살아간다.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나의 감상은 이렇다.


데뷔작이라 그런지 확실히 다른 작품들과는 달랐다. 매 장면 치밀함(혹은 집요함)이 느껴져 젊은 날 강박적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시인은 신춘문예로 등단하기 위해 등단용 작품을 따로 쓴다는 이야길 들었다. 공을 들여 단단하면서도 사랑받고픈 의지가 강한 작품들. <환상의 빛>도 그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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