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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Jan 29. 2018

<태풍이 지나가고>

내일이 와도 나아지지 않을 테니 오늘, 여기서 축제를 열자

영화 본 지 몇 주가 지났는데 뒤늦게 리뷰를 쓴다페퍼톤스 노래를 듣다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낭만적 패배주의’. 이렇게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되고 싶은 어른이 됐어?”라는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태풍이 지나가고>와 페퍼톤스가 공유하는 이 감성에 빠져들 것이다.



십수년 전 받은 문학상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주인공 료타(아베 히로시)는 불륜 뒷조사을 주업으로 삼는 사설탐정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이혼당했고 양육비조차 댈 형편이 못 된다새 소설은 다만 포스트잍에 써 붙인 대사 몇 줄이 고작이다과거를 그리워하고 미래를 희망하며 현재에서 표류한다그런 그가 태풍이 지나가는 하룻밤 새 깨닫는 건 수긍이다비루한 현재라도 수긍하고 다시 살아가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 그리도 애증했던 아버지의 셔츠를 꿰어 입고 집을 나서는 료타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아마도 그는 이제 조금 편안해질 거고 불행도 조금은 옅어질 것이다.


하나레구미 - 심호흡 / 태풍이 지나가고 OST


주제곡 '십호흡'은 락 밴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20대 주인공을 그린 영화 <소라닌>에서 그랬듯 과거의 자신에게 이별을 고한다. 낭만적으로 패배하고 다시 살아가자고 말한다. 거대담론 대신 소박한 행복을 노래하는 옥상달빛이나 이미 지나버린 찬란한 순간을 애틋하게 추억하는 페퍼톤스의 감성과도 같다. 애써 웃어 보이는 얼굴이 그렇듯, 밝은 겉모습 뒤에는 처연함이 서려 있다. 내일이 와도 더 나아지지 않을 테니 오늘 여기서 축제를 열자는 현명한 전언은 아무리 밝게 얘기해도 어쩐지 서글퍼져 슬쩍, 안구에 습기가 차오른다.



옥상달빛 - 희한한 시대


페퍼톤스 -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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