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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Oct 16. 2016

<레베카>

오갈 데 없는 젊은이의 초상

이제야 보게 된 히치콕의 대표작  <레베카>는 1940년 작이고 매우 재미있었고 ‘반전영화’였다. 이 이상 뭐라 해야 할까… 솔직히 하고픈 말은 많은데 꺼내놓기가 꺼려진다. 이건 <레베카>뿐 아니라 이른바 검증된 명작을 접할 때면 언제나 느끼는 불안감이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그것도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 일찍이 여러모로 평가를 끝낸 작품에 대해 ‘영알못’인 내가 한마디 보탠다는 게 부끄럽게 느껴지고, 그렇다고 내가 느낀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펼쳐놓자니 젠체하고픈 허영심을 버리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말하는 수밖에 없다. 민망함 무릅쓰고라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세상에 대고 소리칠 때 조금의 존재감이나마 얻고 의기양양해지는 게 내가 타고난 기질이기 때문이다.


<레베카>는 지금까지 봤던 히치콕 영화들―생각나는 대로 <현기증>, <싸이코>, <새>, <이창>, <마니>, <다이얼 M을 돌려라> 등등―가운데서 재미로 따지면 꽤 상위 그룹에 랭크됐다. 영화 곳곳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스펜스나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미스터리도 물론 흥미진진했지만, 무엇보다 주인공 ‘나’가 낯선 데다가 지나치게 고급스러워서 자괴감을 느끼게 하는 환경에 어떻게든 적응해보려 안간힘을 쓰는 설정에 굉장히 몰입해 버렸다.

‘나’는 젊고 아름답지만 어리숙하고 자기 확신이 없는 인물이다. 수다스럽고 경박한 귀족 반 호퍼 부인의 시중을 들며 생계를 근근이 살고 있는데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유명한 부자 막심 드 윈터와 사랑에 빠진다. 막심은 막대한 재력과 출중한 외모를 갖춘 남자지만 어쩐지 어둠의 스멜이 풀풀 풍기는데 1년 전 보트 사고로 아내 레베카를 잃은 탓이다.

막심과 ‘나’의 연애는 불편하다. 막심은 너무 나이가 많은 데다가 깔끔한 매너를 가장하지만 아무 때나 내킬 때 불러냈다가 자기 기분이 상하면 티 팍팍 내는 자기중심적이고 괴팍한 중년 남자다. 막심은 만난 지 며칠 만에 청혼하고 둘은 결혼해 휘황찬란한 대저택 맨들리로 거처를 옮기지만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걷듯 불안한 상황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죽은 지 1년이 지났어도 집 안 곳곳에서 굳건히 존재감을 뿜어내는 레베카의 흔적과 홀로 씨름한다.

여전히 레베카의 하인임을 자처하는 덴버스 부인은 대놓고 불편함을 드러내고 막심은 자주 자리를 비우는 곤란한 상황에서 ‘나’는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드 윈터 부인’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만 또 다른 시련이 닥친다. 막심이 레베카를 죽였다는 의혹이 커져가고 법정에 서게 되자 ‘나’는 쓰러지는 연기까지 해가며 막심을 보호하려 한다. ‘나’는 의심 없이 자신이 막심을 사랑한다 믿고 막심은 그것을 당연히 여긴다.

내가 볼 때 ‘나’는 돈 없고 기댈 곳 없는 고단한 상황에서 막심 자체가 아닌 드 윈터 가문의 안정적인 배경에 포섭되기 위해 자신을 내던진 것처럼 보였다.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서 자기가 아닌 레베카가 되기 위해 온갖 히스테리를 겪어내는 ‘나’의 힘겨운 나날은 원하는 직업을 갖지 못하는 한국 취준생의 거울상처럼 보였다. 갈 곳은 저기밖에 없는데 거기서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길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는 주변인의 일대기처럼 보여 나로 하여금 한바탕 자기연민 파티를 벌이는 계기가 됐다.



덧붙임)

할 수 있는 일(job)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성에 안 차서 그걸 하지 않을 때 은연 중에 날아드는 괄시와 비난은 다 큰 어른이라면 조용히 참고 감내해야 할 당연한 업보 같은 것이지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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