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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Jan 12. 2017

<물숨>

욕심 많은 해녀들



물 밖에서 들이쉰 들숨이 다했을 때 견디지 못하고 머금는 한 줌의 물. ‘물숨’은 그렇게 해녀를 죽음으로 데려간다. 영화는, 그리고 어느 노년의 해녀는 그것에 ‘욕심’이라는 이유를 붙인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물숨에 목숨을 잃는다. 우도에 사는 삼백 명 남짓의 해녀 가운데 매해 한두 명은 그렇게 바다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그 욕심 많은 해녀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해녀왕’이 1년에 4천만 원을 벌고, 2천만 원을 채 벌지 못하는 해녀도 수두룩하다. 매일 8시간을 꼬박 일하고, 저녁에 먹는 한 끼가 식사의 전부인 그 욕심 많은 해녀들은 변화무쌍한 날씨와, 수시로 머리 위를 가르는 고깃배와, 물숨의 공포를 감수하며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매일 바다에 뛰어든다.


해녀 스스로 욕심 때문이라 하는데 그런 소박한 욕심도 다 있냐며 어깃장을 놓을 수는 없다. 다만 거대 도시 서울을 숨 쉬게 하는 욕심과 우도 해녀를 숨 쉬게 하는 욕심은 분명 다르다고 말할 근거를 궁리할 뿐이다. 해녀는 욕심을 부리면 죽는다. 욕심과 죽음의 거리는 코앞이다. 이와 달리 서울의 욕심은 비대한 위장 같다. 채워 넣을수록 부피가 커져서 욕심의 끝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서울에서 우도 해녀의 욕심을 관망하는 것은 고루한 선비의 뒷짐 진 자세일까. 해녀의 명맥이 끊기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녀 문화’는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재로 보관될 것이다. 마침 유네스코에 등재도 됐다고 하니, 그 숭고하고 뭉클한 느낌은 진해져 갈 것이다. 지금 여기에는 없는, 그때 거기에 있었던 것으로 소중하게 간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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