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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Feb 22. 2018

<리틀포레스트>

프롤로그

브런치 무비패스에 당첨돼 시사회에 갔다. 그리곤 상영 내내 눈물 찔끔, 박장대소를 번갈아 하며 즐겁게 관람했다. 엔딩크레딧이 오를 때 내 기분은 짜증스런 화요일 저녁의 바이브를 몰아낸 상쾌한 상태였다. 그런데 막상 키보드를 잡으니 불치의 고질병이 도졌다. 냉철한 평론가 어른이 내게 빙의해 노잼 진지충의 문장만 쏟아낸 것이다. 흠냐. 뭐, 어쩌겠어. 다만 스스로 일말의 위로로 삼는 건 이 글은 나의 브런치 매거진인 ‘영화의 그늘’에 등록된다는 점이다. 그늘은 언제나 그늘 밖보다 어둡다. 천성이 원래 그런 것이다.



‘패배주의’ - 감출 수 없거나 감추지 않거나


<리틀포레스트>는 시대를 앞서는 영화는 아니다. TV예능 <삼시세끼>, <신혼일기>를 연상케 하는 소박하지만 유유자적하는 ‘요리지상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거창한 목표의식과 드라마틱한 우여곡절을 구시대의 유물로 인식하는 ‘요즘것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대중적인 소품물(小品物)이다. 뻔한 얘기가 뻔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만 뻔한 얘기 곳곳에 감독 임순례의 숨결이 서려 있다는 것이 얼마간 신선하다. 임 감독의 띵작을 꼽으라면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가 높은 비율을 차지할 거다. 시골이라는 판타지를 동력으로 삼는 <리틀포레스트>와는 전연 딴판의, 찌질한 예술가 군상을 그리는 음울한 사실주의 영화다. 그런데도 두 영화의 중심에는 공통된 감성이 뿌리박혀 있다. “나는 안 될 거야 아마” 식의 패배주의다.



패배주의는 원작인 일본영화(2015)에 더 선명히 드러난다. 주인공은 도시 생활의 각박함에 완전히 탈진해 도망치듯 시골을 찾는다. 그곳에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발견한다. 그런데 차이도 분명하다.


일본영화는 친구 한 명이 어쩌다 집을 찾는 거의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하는 반면, 한국영화는 언제나 대문이 열려 있어 남사친 재하(류준열), 어릴 때 절친 은숙(진기주)가 제집 드나들 듯 들러 요리를 ‘함께’ 먹는다. 서울에 두고 온 남친과도 헤어지지 않은 데다가, 홀연히 떠나버린 엄마(문소리)가 유령처럼 출몰해 주인공 혜원(김태리)이 “제발 내 머릿속에서 나가줘”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일본영화는 완전한 ‘절망 이후’에 대한 얘기라면 한국영화는 그래도 남은 ‘미련’이 영화 전반을 가로지른다. 그래서 일본영화는 적적하고 한국영화는 발랄하다. 로컬라이징. 아무래도 원작 그대로의 감성은 한국 관객에겐 부담스러울 거라 생각해 내린 결정이리라 결론적으로 한국영화는 절망의 맛을 약간 줄인 뒤 소통의 맛을 더 넣어 달큰한 요리가 됐다.


+나의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면 행복해져? 혼또니?


<리틀포레스트>를 쉬이 상스럽게 평하자면 ‘짜치지 않는 힐링영화’다. 보고 나면 기분 전환이 확실히 된다. 다만 혼종, 짬뽕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도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혜원은 시골로 떠나온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릴 때 느꼈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그런 것들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우쳤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겨울이 지나야만 알 수 있는 게 있단다.” 지루한 시골에 살며 선망했던 도시 생활은 알고 보니 겨울이었고 그런 시련을 겪으니 결국 진짜 행복이 뭔지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정착한다는 얘기다.


아무리 판타지라고는 하지만 너무 갔다는 생각이다. 집(home)은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마음속에 있을 때는 낙원이지만 현실로 끌어내리면 또 하나의 고약한 생활일 뿐이다. 걱정은 잠시 지운 채 판타지에 맘껏 몰입하다가도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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