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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May 08. 2018

<라이크 크레이지>

7년 만에 다시 보고 나의 지난한 연애사를 뒤돌아봤어요

애정이 듬뿍 담긴 눈길로 서로를 마주보는 연인의 얼굴로 도배된 영화를 두 시간 남짓 보고 있노라면 고이 잠들었던 연애세포가 잠시간 깨어나는 기분이 든다. 불확실한 미래를 비롯해 고민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삶에서, 연애라는 지극히 한정된 부위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다시금 곱씹어 보게 되는 것이다.    


<라이크 크레이지>는 20대 중반에 처음 관람한 뒤 여러 번 다시 찾아본 영화다. 대사를 거의 다 욀 정도로 좋아했더랬다. 그런데도 재개봉 시사회에 참석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이제 서른한 살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나에게 이 영화가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끔씩 꺼내보면 좋다는 ‘어린왕자’처럼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상영시간 내내 이전에 느꼈던 감상과는 딴판의 생각들을 잔뜩 할 수 있었다.



몰입도 짱! 음악도 짱! 과도한 핸드헬드는 글쎄…


일단 좋은 영화인 것만은 분명하다. 연애에 서툰 남녀 주인공이 겪는 장거리 연애의 고단함을 다루는 영화인 만큼, 연인이 사랑의 싹을 틔우는 초반 연출이 극의 몰입과 공감의 정도를 좌우할 테다. 그 부분에서 마치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달콤하고도 아련한 순간들을 기막히게 표현해내는 동시에 극의 전개도 무척 빨라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은 채 무사히 본론에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중후반 주인공들이 짧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과정도 무척이나 현실적으로 그려냈기에, 몇 번의 연애를 경험했던 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지난한 연애사를 꺼내볼 수 있으리라 자신 있게 추천한다. 더욱이 김민희, 이민기 주연의 <연애의 온도>처럼 다큐에 가까운 현실 감각으로 찌질함을 전면에 부각하지 않은 점도 높게 평가하고 싶다. 현실에 발을 디디면서도 적당히 미화했기에 오히려 주인공들의 감정에 깊숙이 빠져들 수 있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취향의 차원에서 상하좌우로 요동치는 핸드헬드 기법이 부담스러웠고 조금은 조악하다고도 느껴졌다. 연출 방법으로 적절했는지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테지만 그저 피곤에 찌든 30대 남자 관객 입장에서는 다소 ‘정신 없었다’고 표현하면 맞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해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영화는 미국 독립영화제의 본좌급인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감독상을 수상했다. 저예산 독립영화의 감성이 부담스러운 것을 보니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덧붙여서 빼어난 OST는 꼭 언급해야겠다. 더스틴 오 할로란이라는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가 전곡을 작곡하고 연주했다. 어쩌면 당연히도 모든 넘버가 피아노 연주곡인데 영화를 압도하는 대신 감정곡선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속된 말로 하면 영화랑 ‘잘 붙는다’. 게다가 음악만 따로 들어도 무언가 감정이 일어날 정도로 감성적인 멜로디여서 이 영화에 대한 애착을 한층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할로란은 후에 이 영화의 감독인 드레이크 도리머스의 <우리가 사랑한 시간>(2013)이라는 영화의 OST도 맡았다. 이 역시 좋다.  



더 이상 사랑에 미칠(crazy) 수 없을 때


아래는 내가 과거에 썼던 리뷰다. 영화에 대한 설명을 대체하기 위해 덧붙인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남녀 주인공 제이콥(안톤 옐친)과 안나(펠리시티 존스)는 사랑에 빠진다. 따뜻한 조명 아래 오가는 눈빛, 상점뿐인 거리를 놀이터로 만드는 둘만의 산책. 아주 진하게 그러나 신속하게, 장면들이 스쳐간다. 둘은 LA에 있는 대학에서 만났고, 그곳에서 지내지만 안나는 영국인이다. 그래서 비자 문제로 잠시 영국에 돌아가야 할 날이 다가온다. 예고된 이별이지만 둘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얼마나 길지 가늠이 안 되는 두 달 반.  


열정의 불길에 휩싸인 그들은 결국 합리적이기를 포기한다. 안나는 대책 없이 미국에 머물며 제이콥과 원 없이 함께한다. 그렇게 현실을 보류한 여름이 평화롭게 흘러간다. 시간이 흘러 가을이 오고,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러 며칠간 영국에 갔던 안나는 미국 입국을 제지당한다. 예고 없이 찾아온 기약 없는 이별이 그들을 갈라놓는다.


둘에서 하나가 되었던 그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다시 둘이 된다. 남겨진 건 공허함와 의무감. 대책 없이 믿어버렸던 사랑을 책임질 시간이다. 누가 설득당할 것인가. 시차 5시간의 피로인가, 뜨거웠던 사랑의 기억인가. 둘은 각자의 삶에 적응해가지만, 지루한 일상 속 밀려든 그래도 너 ‘같은’ 사람은  없었어!라는 확신에 재회한다. 그런데 다시 만난 그들은 서로를 확인하기 바쁘다. 그들은 조금 달라져 있다. 너무 짧은 재회는 기약 없는 이별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숭고하다. 그 순간에는 어떠한 믿음도 필요하지 않다. 반짝이는 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또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막 타오르기 시작해 연료 걱정이 없는 불길이 있고, 그 불을 제외하면 전부 어둠이다. 다른 건 보이지 않고 볼 이유도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풍경이 선명해진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분산된다. 이제 믿음이 필요한 시간. 눈 속 깊숙이 새겨뒀던 불길의 기억을 믿기로 한다.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하게 타올랐던 그 불.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그 불.  


제이콥과 안나가 처음 만난 날, 안나는 제이콥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위스키를 권한다. “I don't drink much." 위스키가 낯선 제이콥은 조심스럽게 그렇게 말한다. 드디어 안나가 미국에 돌아온 날, 제이콥은 이제 즐기게 된 위스키를 안나에게 권한다. ”I don't drink so much." 건강 관리를 시작한 안나의 말이다.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에서 관람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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