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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Sep 29. 2015

<라이크 크레이지>

더 이상 사랑에 미칠(crazy) 수 없을 때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남녀 주인공 제이콥(안톤 옐친)과 안나(펠리시티 존스)는 사랑에 빠진다. 따뜻한 조명 아래 오가는 눈빛, 상점뿐인 거리를 놀이터로 만드는 둘만의 산책. 아주 진하게 그러나 신속하게, 장면들이 스쳐간다. 둘은 LA에 있는 대학에서 만났고, 그곳에서 지내지만 안나는 영국인이다. 그래서 비자 문제로 잠시 영국에 돌아가야 할 날이 다가온다. 예고된 이별이지만 둘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얼마나 길지 가늠이 안 되는 두 달 반. 


열정의 불길에 휩싸인 그들은 결국 합리적이기를 포기한다. 안나는 대책 없이 미국에 머물며 제이콥과 원 없이 함께한다. 그렇게 현실을 보류한 여름이 평화롭게 흘러간다. 시간이 흘러 가을이 오고,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러 며칠간 영국에 갔던 안나는 미국 입국을 제지당한다. 예고 없이 찾아온 기약 없는 이별이 그들을 갈라놓는다.

 

둘에서 하나가 되었던 그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다시 둘이 된다. 남겨진 건 공허함와 의무감. 대책 없이 믿어버렸던 사랑을 책임질 시간이다. 누가 설득당할 것인가. 시차 5시간의 피로인가, 뜨거웠던 사랑의 기억인가. 둘은 각자의 삶에 적응해가지만, 지루한 일상 속 밀려든 그래도 너 ‘같은’ 사람은  없었어!라는 확신에 재회한다. 그런데 다시 만난 그들은 서로를 확인하기 바쁘다. 그들은 조금 달라져 있다. 너무 짧은 재회는 기약 없는 이별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숭고하다. 그 순간에는 어떠한 믿음도 필요하지 않다. 반짝이는 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또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막 타오르기 시작해 연료 걱정이 없는 불길이 있고, 그 불을 제외하면 전부 어둠이다. 다른 건 보이지 않고 볼 이유도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풍경이 선명해진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분산된다. 이제 믿음이 필요한 시간. 눈 속 깊숙이 새겨뒀던 불길의 기억을 믿기로 한다.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하게 타올랐던 그 불.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그 불. 


제이콥과 안나가 처음 만난 날, 안나는 제이콥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위스키를 권한다. “I don't drink much." 위스키가 낯선 제이콥은 조심스럽게 그렇게 말한다. 드디어 안나가 미국에 돌아온 날, 제이콥은 이제 즐기게 된 위스키를 안나에게 권한다. ”I don't drink so much." 건강 관리를 시작한 안나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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