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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Sep 29. 2015

<그녀>

내겐 너무 완벽한 그녀

사랑은 예외 없이 난해하다. 상대가 내게 최적화된 OS라 해도 ― 김혜리 


사랑은 실패를 전제한 선택이다. 완결이 있는 이야기로서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 완전한 사랑이 있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확률이 희박한 도박임에는 분명하다. 여타 도박이 돈, 나아가 인생 전체를 거는 외부적 도박이라면, 사랑은 ‘자아’를 베팅하는 내부적 도박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필요한 용기는 다른 용기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말하자면 사랑은 자아의 사생결단이라 할 수 있다. 


사랑에 관한 잠언은 무수하다.  그중 진리에 가까운 것이 있다면 ‘사랑은 나의 반쪽을 찾는 것이다.’일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플라톤의 <향연>에서도 발견된다. 향연은 소크라테스를 포함한 7명이 사랑에 관한 연설을 주고받는 플라톤의 대표적 대화편이다.  그중 아리스토파네스는 태초의 인간은 세 종류였다고 말한다. 남녀, 남남, 여여. 지금처럼 납작한 인간이 아닌 둥근 모습의 인간. 그런데 신이 오만한 인간을 반으로 쪼갰고, 그 이후 지금처럼 자신의 반쪽을 찾는 처절한 노력을 죽기 전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뮤지컬로 더 유명한 영화 <헤드윅>에서도 레퍼런스로 인용되었고, 이십 대 초반 영화를 봤던 나는 저것이야말로 내가 진정 외로운 이유였다고 탄복했다. 그래, 나의 고독은 인간 존재의 필연성이야!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을 수밖에 없고 또 실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her>는 이 자명한 생각에 딴지를 건다. <her>의 주인공인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OS와 사랑에 빠진다. 그가 사랑에 빠지는 OS는 비록 몸은 없지만 그의 신상정보를 고려해 오직 그를 위해 진화한다. 그야말로 최적화된 그녀(her)인 것이다. 둘은 그 어떤 연인보다 내밀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농밀한 사랑을 나눈다. 상대의 인격과 감정을 보듬을 수 있는 두 존재의 완전한 사랑.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랑은 결국 끝이 난다.  


비록 가상의 상황이지만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세상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을 나의 반쪽을 찾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나의 날 선 부름에 영화는 사랑의 정의 자체를 바꾸라고 응답한다. 삶이 그렇듯 사랑은 완성될 수 있는 관념이 아니다. 흐르게 둘 수 있을 때 비로소, 조금 더 외롭더라도 자기연민이나 집착이 아닌 사랑에 가까워질 수 있다. 애초에 사랑은 ‘상태(status)’가 아닌 ‘동사(verb)'라는 것. 


그러나 여전히, 딜레마는 남는다. 사랑은 ‘하는 것(do)’이 아니라 ‘빠지는 것(fall)’이라는 것. 이 사랑이 마지막이라고 믿고 모든 것을 내던지지 않는 한 사랑은 애초에 시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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