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만 남긴 생애 첫 ‘아메리칸 슬로우 라이프 무비’
이렇게 정의하면 어떨까. <스탠바이, 웬디>는 아메리칸 슬로우 라이프 무비다. 할리우드 영화의 관습을 충실히 따르는 이 영화는, 설정도 전개도 슬로우 라이프 무비의 원조인 일본의 <안경>, <카모메식당> 등과는 다르지만 영화를 보면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둘이 비슷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슬로우 라이프 무비는 삶의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춰서 그동안 무심코 스쳐 보낸 사소한 순간의 소중함을 재조명하고 결국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우는 휴먼 드라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왜 슬로우 라이프 무비처럼 보이는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역피라미드 구조를 빌려오겠다. 아래로 갈수록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이다.
1. 이 영화는 한 소녀의 성장담이다.
2. 이 영화는 <스타트렉>을 좋아해 시리즈 전체의 명대사는 물론이고 서브 캐릭터의 시시콜콜한 신상정보까지 줄줄이 욀 수 있는 한 소녀의 성장담이다.
3. 이 영화는 샤워 방법, 출근길 등의 생활 습관을 암기해 매번 되짚어야 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는 자폐증을 가진 한 소녀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TV시리즈인 <스타트렉>의 공모전에 지원하기 위해 직접 쓴 시나리오를 들고 LA로 모험을 떠나는 로드무비이자 성장담이다.
이 영화는 1~3번을 같은 선상에 둔다. 자폐증을 가진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비장애인이라면 손쉽게 해냈을 3일간의 짧은 여행을 고난과 역경의 드라마로 그리는 방식으로 관객 중 다수를 차지하는 비장애인의 일상의 소중함을 환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도가 성공적이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NO!’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비장애인인 나 같은 관객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우고자 장애인의 입장을 들이대 봐야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자폐증은 선천적 질병이다. 이를 외부와의 소통을 거부한 채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히키코모리적 ‘태도’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기본 설정부터 공감을 끌어내지 못한 이 영화는 주인공 웬디(다코타 패닝)의 천부적인 스토리텔링 능력과 문학적 표현력을 계속해서 부각하는 탓에 도대체 이게 장애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회적 소수자의 이야기인지, 다만 세상과 불화하는 초능력 소녀의 이야기인지를 헷갈리게 했다.
더욱이 웬디의 여행은 다소 위기를 겪긴 하지만 도무지 위험해 보이지가 않았다. 덕분에 혹여나 그가 해를 입을까 조마조마한 감정은 느끼지 않았지만 동시에 기승전결 법칙에 따라 고조되는 갈등 구조도 와닿지 않았다.
부수적으로 서브스토리를 연결짓는 감정선도 느슨했고 초반에 던졌던 떡밥들을 전부 회수하지 못한 채 서둘러 마무리 짓는 것도 아쉬웠다. 그래서 캐릭터들이 밋밋하고 개념적으로 다가왔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시리즈지만, 미국보다 골수팬이 적은 <스타트렉>의 매력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작은 위안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에서 관람한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