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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Dec 30. 2020

스토너_존 윌리엄스

'버티는 삶에 관하여' 스토너의 경우

한 줄 정리

스토너는 평범하다. 그래서 신선하다. 이토록 우리와 닮은 인물은 드물기에. 50년 전 발표된 소설이지만 신기하게도 요즘 시대와 공명하며 요란한 말잔치와 사회적 고립이라는 이중고를 겪는 우리의 외로움을 위로한다. 과묵하나 내적 신념을 고수하는 스토너가 시련에 불평하지 않으며 농부인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 묵직한 위로를 건넨다.

외적인 면

한마디로 '중고신인' 같은 작품이다. 1965년 미국에서 발표 당시 주목받지 못했으나 저자가 작고한 뒤 20년이 지난 2013년 뒤늦게 빛을 본 뒤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인물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 흡입력이 높으며 평범한 한 남자의 인생이 소설 무대에서 이토록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닉 혼비, 이언 매큐언, 줄리언 반스 등과 함께 국내에선 신형철, 김연수, 최은영 등의 문인들도 애정을 표한 바 있어 더욱 신뢰가 가는 작품이다.

내적인 면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아무런 꿈도 변화에 대한 기대도 없이 농부로 살다 죽으리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농업대학에 진학한 뒤 우연히 듣게 된 문학 수업에서 문학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다. 노력 끝에 대학 교수가 되지만 세상과 섞이지 못하는 그의 삶은 국면마다 갈등과 고통을 빚어낸다. 그의 고통은 때로 과하다 보일 정도로 가혹하지만 가만 보면 우리가 겪고 있는 말 못할 고통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혼자만의 아픔을 견디면서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품위 있는 태도가 영감과 위로를 선사한다.

주관적 감상

1

스토너는 잘 참는 인간이다. 얼마나 잘 참는가 하면 저자가 캐릭터를 구상하며 첫 줄에 ‘스토너의 인내력은 경이롭다. 보는 이가 답답해 미칠 정도로’라고 썼을 것 같다. 플롯은 단순하다. 아무런 특징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는 스토너의 부고 소식으로 시작해 그의 인생을 탄생부터 죽음까지 찬찬히 따라간다.

그리고 예상되듯 그의 삶은 고난과 인내의 연대기다. 차곡차곡 마련된 시련에 꾸준히도 던져지는 스토너. 소설 속 인물들ㅡ어릴 적 유대감을 형성했지만 아내 이디스의 방해로 교류가 끊기는 딸 그레이스, 짧은 사랑을 불태우는 연인 캐서린, 자기 살기 바쁜 친구 핀치 정도를 제외하면ㅡ은 오로지 그의 불행을 위해 준비된 장치로 보일 정도다.


2

물론 스토너는 그저 참는 인간만은 아니다. 책에선 그의 내밀한 속사정이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정말 필요할 때 그의 단호함은 누구보다 단단하다. 가진 것 전체를 포기하는 선택이 될지라도 개의치 않는 것 같다. 동시에 그의 단호함은 무모함과는 거리가 멀다.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묵묵히 따르면서도 고유한 내적 기준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마흔 살 넘어 뒤늦게 사랑에 눈뜨게 해준 캐서린과의 연애가 그렇다. 둘의 관계가 주변 상황의 압박으로 현재의 삶의 반경 내에서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졌을 때 그는 단둘이 훌쩍 떠나는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그 이유다. 그는 자기가 이룬 걸 지키려고 이런 결정을 하는 게 아니다. 이 연애를 포기하면 내면의 불꽃이 영영 꺼져버릴 걸 알면서도 캐서린과 딸 그레이스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쪽을 선택한 거다.


이별을 결정한 뒤 “그는 알고 있었다.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 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스토너의 특별함은 사건의 여파를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빛을 발한다. 자신이 가졌던 가장 빛나는 것을 잃어 버린 뒤에도 '이미 죽은 상태'로 끈질기게 살아가는 모습이 그것이다. 문학도로서 언제나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그가 이런 선택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그를 움직이는 내적 기준은 뭘까.


3

이에 대한 단서는 그의 대학 시절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매스터스의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매스터스는 스토너를 평가하며 "자네는 몽상가이고 광인이야. 세상은 더 미쳤지만……산초가 없는 우리만의 돈키호테……자네는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지……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곧바로 알 수 있을 걸세……자네 역시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다는 걸……자네가 세상과 싸울 거라는 얘기가 아냐. 세상이 자네를 잘근잘근 씹어서 뱉어내도 자네는 아무것도 못할 걸세. 그냥 멍하니 누워 무엇이 잘못된 건지 생각하겠지..……너무 약하면서 동시에나 너무 강하니까. 이 세상에 자네가 갈 수 있는 자리는 없네."

어쩌면 스토너는 정말로 미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미친 걸 알면서, 다시 말해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잘 알면서도 세상이 던져주는 책임들을 묵묵히 수행하고 그걸 억울해 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는 우직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행동하는 게 자신의 삶에 대한 이상, 존엄성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는다.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으나 세상에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불행을 온몸으로 맞아내는 것, 그것이 그가 믿는 삶이다.

덧) 잠시 스토너의 아내 이디스에 대해 말해보자. 그녀는 불행한 스토너를 괴롭히는 악녀로 그려진다. 풍족하지만 엄격하고 답답한 집안에서 ‘장식품’으로 키워진 탓에 자아를 형성할 기회를 갖지 못했고 그래서 인생 내내 방황하며 불행한 자신의 인생의 고통을 스토너를 괴롭히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소설에 제시된 내용을 통해서도 그녀의 악행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나 주인공 스토너에 집중하다 보니 기행을 일삼는 피상적인 인물로 보이는 면도 없지 않다.


밑줄 그은 문장

"가끔은 자신이 식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자신을 찔러 활기를 되찾아 줄 뭔가를 갈망했다. 고통이라도 좋았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스토너는 아이의 변화를 지켜보며 슬픔을 느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만을 보여주었다. 죄책감이라는 편안한 사치품을 자신에게 허락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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