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것 아닌 것들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나는 혹여나 콜린이 길에서 로버트와 나를 스쳐 지나가더라도 그가 그 상황에 대해 두 번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행동이 배신임을 아는 것은 나 자신의 마음, 어쩌면 나 자신의 가슴뿐이었다."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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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그날 밤 이후 내가 우울증에 빠졌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나는 서서히 형성되어가고 있던 내 삶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게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나는 그때에도 콜린이 내게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러다 보니, 나도 나 자신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pp.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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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 생각에,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시킬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안하다고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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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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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이며 현대적이다. 단편 고유의 응축된 서사를 통해 우리의 고독을 담담히 위무한다. 사건이 벌어진 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 전말과 여파를 진술하는 비극의 주인공에게 진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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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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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앤드루 포터는 현대 미국에서 주목받는 단편 작가 중 하나다. 미니멀한 문체와 서사 중심의 전통적인 방식은 카버나 치버를 연상하게 한다. 2008년 출간한 데뷔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플레너리 오코너상을 수상하는 등 찬사를 받으며 일류 작가로 급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2012년 장편소설 <어떤 날들>을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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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터의 작품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는 태도에서 그리스 비극을 닮았다. 희극은 인물을 독자와 분리해 조롱하게 하는 반면 비극은 인물과 독자 사이에 동질감을 형성해 연민하게 한다. 포터는 특정 상황에서 특정 관계가 놓이면 이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효과적으로 설득한다. 비극이므로 당연히 실패가 예정된 관계들이다.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거나 관계 자체가 어그러져 버릴 게 분명한 처지를 알지 못하는 진지한 인물들이 분투하는 장면들은 지금의 우리를 만든 우리 과거의 중요한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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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참여한 독서모임에서 한 분이 포터는 방정식의 해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방정식 자체를 보여주는 작가라고 말했다. 방정식이란 위에서 말한 실패가 내정된 관계와 상황의 조합일 테다. 단편의 특징이자 한계일 수 있다. 해답을 제시하기엔 분량이 충분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분량의 제약과 무관하게 ‘방정식 보여주기’가 어떠한 현란한 조언보다 내면의 고독을 깊이 위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포터의 인물들이 마주한 갈등은 일상적이지만 그에 대한 그들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으며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물론 선택 하나에 모든 짐을 지우자는 건 아니다. 그들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문제를 드러내는 징후에 불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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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포터는 후일담을 즐겨 쓴다. 주인공이 사건과 서술의 시간차를 두고 그 일의 여파를 회고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발생 당시 사건의 심각성보다 그 일이 삶의 항로를 어떻게 바꿨는지에 주목하게 된다. 이 같은 근본적인 변화는 점진적이지만 불가피하다. 후일담은 두 가지 효과를 갖는다. 먼저 아련함과 먹먹함이다. 이미 지난 것은 언제나 얼마간 추억 보정을 받는다. 그러니 설사 그것이 삶을 안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해도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태도를 동반한다.
둘째, ‘어쩔 수 없는 무엇’에 대한 자각이다. 불가피성, 불가역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미 지나버린 일이므로 우리는 손을 쓸 수 없다. 그리고 그건 비단 과거의 일에 국한되는 질서는 아니다. 앞으로 우리가 맞이하게 될 삶에서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우리를 무기력한 체험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 그건 정말이지 어쩔 수 없다는 것. 포터가 전하는 통찰이자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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