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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Aug 08. 2021

'여름소설' 두 권

유디트 헤르만과 백수린의 여름 이야기

1.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다. 해묵은 낭만 속에서만. 산뜻하고 서늘한 가을날 책 따위에 코 박고 있으면 바보다. 글자로 밥줄을 엮으려 분투하는 수험생이 아닌 이상 말이다. 무엇보다 공원 벤치에 앉아 독서를 즐기는 괴인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상상 이상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과도한 자신감과 무심한 고집의 전시 행위다. 리더스필리아(Readersphilia) 같은 의학 용어가 절실하다.


현실에서 독서를 즐기기에 알맞은 공간은 여름의 실내다. 성능 좋은 에어컨이 제공하는 신선한 기온과 습도, 적당한 백색소음은 쾌적함의 다른 표현이다. 안락한 공간에서 단어의 질감을 음미하고 행간의 신비를 더듬는 건 아주 적절한 여가 활동이라 할 수 있다.


하여 여름에 읽기 좋은, 제목에 떡하니 ‘여름’이 들어간 소설집 두 권을 소개한다. 모두 여성 작가의 작품이다. 이 두 소설집의 표제작은 각각 차분한 태도로 어느 여름의 별장 혹은 빌라의 추억을 되짚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 말곤 둘을 연결할 지점이 많지는 않지만 어쨌든 우리는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기에 여름을 느끼고 생각하고 얘기해야 할 의무가 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에 나른해진 몸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 채 흘려보냈던 그 시절을.


2. 유디트 헤르만은 잉에보르크 바흐만과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뒤를 잇는 독일의 대표적 여성 작가다. 1998년 데뷔작 <여름 별장, 그 후>로 “독일 문학이 고대했던 문학적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데뷔했다. 당시 그의 스타일리쉬한 문체는 신선하고 파격적이었고 당시 독일 팝문학의 유행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독일 특유의 색채보다는 인터내셔널한 감성이 두드러진다. 헤르만이 뉴욕에서 살았던 경험 때문에 그곳이 배경이 된 소설도 있는데 이런 점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공간에서 감정이 변화에 집중하는 소설이라 한국인인 나도 몰입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헤르만의 작품에 대해 한 가지만 말하라면 독특한 문체를 꼽아야 한다. 잽을 끊어치듯, 혹은 파편을 이어 붙이듯 조심스레 이어가는 섬세한 문장들은 장황한 설명을 보태지 않고도 그날의 풍경을 오롯이 체험하게 한다. 생략된 말들, 암시만으로 추측해야 하는 장면들은 그러나 작품 속 세계를 모호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한 템포 늦게 진실을 선명히 깨닫게 해 충격을 선사하고 서늘한 기분마저 느끼게 한다. 여름에 어울리는 소설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작품의 결말엔 약간의 반전이 있다. 특히 표제작에서 주인공 입장에서 의뭉스러운 인물이었던 슈타인의 행동이 던져지듯 제시되고 독자는 그 여운을 오랫동안 곱씹게 된다.


<여름 별장, 그후>라는 표제작은 제목만 읽어도 누구나 뭉근한 연기처럼 흩어지는 한때의 기억을 꺼내보게 하는 작품이다. 2년 전 여름 3주 간 친구 여럿이 시간을 보낼 때 함께 했던 슈타인이라는 의뭉스러운 남자가 스치듯 얘기한 별장에 대한 대화를 잊지 않고 집을 샀다고 연락하며 진행된다. 낯설고 불가해한 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나’가 뒤늦게 그와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모습은 불 꺼진 방에서 촛불이 켜지듯 주목하지 않았던 타인의 본 모습이 서서히 눈에 익어가는 경험을 하게 한다. 하지만 그런 인식은 항상 한 발 늦게 오고 놀라움 내지는 미안함 같은 일시적인 감정은 빠르게 휘발된다.


3. 백수린은 2011년 데뷔한 이래 젊은작가상을 두 차례 받는 등 여러 문학상을 휩쓸었고 20대와 30대 여성에게 커다란 지지를 받고 있다. <여름의 빌라>의 주인공들은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태도를 내면의 구심으로 살아간다. 이들을 다루는 문장은 화려하기보다 단정하고, 주저하진 않지만 확신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회한, 분노, 열정 같은 여러 감정을 느끼지만 그 상대를 자의식의 울타리에 가두는 대신 가만히 응시하는 쪽을 택한다. 백수린은 이러한 태도를 우유부단함이 아닌 주체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소극성과 적극성은 우열을 가릴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라는 것.


표제작 <여름의 빌라>는 십여년 전 이십대 초반 떠났던 배낭여행에서 인연을 맺은 독일인 베레나의 초대를 받아 지난여름 캄보디아 여행을 했던 주아가 당시를 회상하며 그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여행은 대체로 순조로웠으나 일정을 마무리 하는 저녁 식사에서, 각각 주아와 베레나의 파트너인 지호와 한스가 캄보디아 사람들의 가난하지만 행복해보이는 삶의 풍경을 두고 언쟁하는 바람에 망쳐지고 만다. 한국인과 독일인, 그리고 캄보디아인은 저마다 다른 삶의 자리, 적나라하게 바라보면 넘을 수 없는 수직적 인종 계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입장 차이를 바라보는 백수린의 시선은 공격적인 대신 조심스러울 것을 제안한다.


백수린은 프랑스 유학 경험에 비롯한 것인지 소설적 공간으로 해외를 즐겨 사용한다. 프랑스로도 가고 미국으로도 간다. 다만 그는 외교관처럼 세계화에 능숙한 인물의 감수성이 아닌 유학생이나 이민자의 그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어학연수나 세계여행이 당연한 시대에 유년을 보낸 나에겐 공감 가는 부분이다. 개인적 베스트를 꼽자면 <폭설>이었다. 어린 시절 이혼 후 재혼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엄마에 대해 성장 과정에서 감정의 변화를 느끼는 ‘그녀’는 오랜만의 재회에서 어떤 미약한 깨달음 내지는 인식의 전환을 겪는다. 백수린이 지향하는 ‘판단중지’의 가치가 가장 빛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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