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을 파는 가게>,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존경하고 애정하는 작가의 왕 스티븐 킹. 왕성한 생산력과 일정한 퀄리티 사이의 균형 감각만큼은 세계 1등이 아닐까 싶다. 다수의 취향과 다르게 나는 그의 장편보다 단편을 즐겨 본다. 창작이라는 마술상자 속을 훔쳐볼 수 있기 때문이고 작가의 머릿속으로 답사를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친절하고 자비로운 킹 옹께서는 창작의 비밀을 직접 털어놓기까지 한다. <악몽을 파는 가게>, <모든 일을 결국 벌어진다> 같은 책에는 각 소설마다 어떤 아이디어에서 이야기가 시작됐고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 유쾌하게 풀어낸 부록이 달려 있다.
물론 이처럼 호기로운 천기누설이 가능한 이유가 있다. 마술의 비밀을 공개했다 온갖 비난에 소송까지 당한 타이거마스크와 달리 위험 부담도 없다. 왜냐하면 킹이 밝히는 아이디어는 단지 씨앗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의 스토리는 예측할 수 없거나 ‘제발 그것만은 안돼’라고 외치고픈 방향으로 흘러간다. ‘뇌절’은 맞는데 세련되고 개연성은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초기의 착상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완성된 작품에도 그 핵심은 남아있다. 이야기라는 생명체의 심장처럼 말이다. 그렇다. 이야기에는 심장이 필요하다. ‘진짜’라고 믿게 하는 힘은 거기서 나온다. 킹이 단순히 노련한 기술자가 아닌 이유는 그가 구사하는 기술에는 목적이 있다는 거다. 나는 이 목적의식이 킹의 작품에 문학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한 분이 스티븐 킹은 죄의식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죽음의 공포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듣고 보니 잔인해서 짜릿하고 까발려서 통쾌한 쾌락을 주는 유희의 도구라고 생각했던 킹의 소설이 달리 보였다. 그의 인물들은 가지각색이지만 죄의식에 시달린다거나 적어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어 나락에 빠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무한한 방향으로 내달리는 듯 보였던 킹의 작품들이 사실은 같은 곳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착상과 전개 방식 모두에서 발견되는 취향과 의도, 그것이 킹의 심장이고 문학성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