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호
언덕에는 언덕에 없는 그가 앉아있다
눌어붙은 영수증의 숫자들은
붉은 핏줄의 문신
손이 조금만 더 파랗게 물든다면
나무의 흑연을 움킬 수 있을텐데
목구멍에 자라난 나무의 마음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하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입에는 빨간 사과가
피처럼 굴러서
그는 혀를 당겨
너에게 잔인한 진심을 쏠 수가 없었고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길래
물렁하고 연약한 인간을 뱉어냈을지
피가 빠져나간 검은 묘비와
자라난 나무들을 보며
내가 쉴 수 없었던 것은
쉴 공간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나라는 공간에서는 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임을
그늘이 비닐처럼 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