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스(2006)
그는 더블린의 밤거리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릅니다. 절절한 가사에 감정이 실린 목소리가 텅 빈 거리를 가득 메우죠. 그때 그녀가 나타나 노래를 들은 값으로 10센트를 기타 케이스에 넣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묻죠.
"빅이슈 사실래요?"
"그럴 돈은 없어요!(고작 10센트 주고 잡지를 사라니?)"
"매일 지나다녔지만 그 노래는 처음 들어요."
"낮에는 사람들이 아는 곡을 듣기를 원해서 제 노래는 아무도 없는 밤에 불러요. 사람들이 안 들어줘요."
"내가 듣잖아요."
"겨우 10센트 내고!!"
"돈이 작아서 불평하는 거예요? 그럼 돈을 벌면 되잖아요?"
"일도 하고 있어요. 저기요. 이제 노래 좀 부를게요.(제발 그만하세요!)"
"누구에 대한 노래죠?"
"누구도 아니에요."
"거짓말, 그녀는 어디 있어요?"
"떠났어요."
"아직도 사랑해요?"
"지저스!!(어떻게 그런 말을!)"
"그녀를 잊지 않았군요. 잊었다면 절대 이런 곡을 못쓰죠. 이 노래를 들려줘요. 그럼 돌아올 거에요."
그는 그녀의 말처럼 헤어진 여자가 그리워 노래를 불렀고, 그녀는 남편과 헤어져 체코에서 아일랜드로 이주한 상태였습니다. 이별의 아픔을 가진 두 남녀가 음악을 통해 만납니다. 영화 원스에서 만남은 하나의 음반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연인과 헤어진 두 남녀가 음악을 통해 만나고,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원스라는 영화 제목처럼 두 사람은 한 번 스치는 인연이었죠. 두 사람 사이엔 특별한 갈등도 불같은 사랑도 존재하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 아마도 그와 그녀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원스는 사랑의 아픔과 이별의 슬픔에 대해 노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유쾌하고 발랄합니다. 어떤 장면에선 귀여운 나머지 미소를 머금게 됩니다. 만약에 영화 원스가 신파의 정석을 향해 달려갔다면 어땠을까요? 슬픔에 취해 울고불고했다면, 거기에 불치병이 등장해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원스는 없었을 겁니다.
그녀는 그에게 마음을 담은 노래를 들려주면 헤어진 사람이 돌아올 거라고 말했죠. 그는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지만 한편으론 노래를 녹음해 그녀에게 갈 계획을 세웁니다. 음반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와 그녀의 미묘한 심리상태가 섬세하게 묘사돼있습니다. 이별한 남녀의 심리상태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었죠. 그 면면들을 보고 있으니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남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헤어진 남자의 심리상태
그는 그녀에게 호감을 갖습니다. 그녀 역시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죠. 그녀의 진공청소기를 고쳐 준 그날 그는 그녀에게 자고 가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거절합니다. 노래 한 번 같이 불렀을 뿐인데... 깊은 관계를 요구하다니 당황할만합니다.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무례한 행동이죠. 보통의 남자들은 연인과 헤어진 사이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놀라운 습성이 있습니다. 당장 눈 앞에 여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애절한 눈빛이 돼버리는 거죠. 동물로 비유한다면 강아지의 애잔한 눈빛이라고 할까요. 불안하고 의지할 데 없는 심리상태여서 누가 손만 잡아주면 어디라도 따라갈 지경입니다.
영화 원스엔 갈등 요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는 바보 같은 남자들의 심리가 작용합니다. 마약을 사기 위해 그의 돈통을 들고 도망치는 안톤과 그의 노래를 듣고 한 번에 대출을 해주는 은행원이 대표적인 케이스죠.
그의 기타 케이스이자 돈통을 갖고 튀는 동네 양아치 안톤과 음반 제작에 필요한 돈을 아무 의심 없이 대출해주는 은행원 아저씨는 정말 희극적인 존재입니다. 대출 전에 갑자기 기타를 들고 노래를 들려주다니 나도 저런 은행원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은행원 역시 가수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순수한 사람이어서 그런 거 겠죠. 어처구니없어 보이지만, 아이 같은 순수함은 어른이 되어도 간직해야 할 큰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아이의 마음이 될 수 없다면, 어른이 되었다 한들 텅 빈 껍데기일 뿐이니까요.
음반 작업을 하기 위해 밴드를 결성하는 과정도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그 부분에서도 남자들 특유의 단순함과 허세가 묻어 있습니다.
그의 음반 작업을 도와줄 밴드는 거리의 악사들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밴드의 결성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는 즉석에서 밴드가 필요하다 말하고,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승낙합니다. 이해타산 따윈 따지지 않습니다. 다만 녹음 작업을 해 본 경험이 없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의 남자들에게도 나타나는 특성이기도 합니다. 누구든 자신을 인정해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는 마음이랄까요. 단순하고 즉흥적이지만 귀엽게 봐줄 정도의 긍정적인 면이 원스에선 잘 표현돼있습니다.
2. 헤어진 여자의 심리상태
그녀는 청소기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에게 찾아갑니다. 거리에서 진공청소기의 손잡이를 잡고 다니는 모습이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부끄러워하거나 남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청소기를 끌고 악기점에 들려 피아노를 치고 그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하니까요. 그녀는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갖고 결혼의 상처를 가진 여자입니다. 거리에서 꽃을 팔거나 빅이슈 잡지를 팔고 나머지 시간엔 청소를 해서 생계를 유지하지만 힘든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헤어진 남자가 이별의 상처로 길 잃은 강아지처럼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이별의 상처보다는 현실의 삶에 충실합니다. 불확실한 미래보다 당장 눈 앞에 해야 할 일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대출을 받으러 갈 때도 큰 도움을 줍니다. 우선 헌 옷 가게에 들려 그를 점잖은 사람으로 변신시킵니다. 중고지만 싸고 좋아서 본인도 여기도 옷을 산다고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귀엽습니다. 실제로 그녀가 입고 다니는 재킷도 그곳에서 산 옷 아닐까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 날 마지막 작업을 앞두고 그와 그녀는 바닷가로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갑니다. 그때 그가 아직도 전 남편을 사랑하냐고 묻습니다. 그녀는 체코어로 ‘밀루유 떼베’라고 대답합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려주지 않죠.
‘밀루유 떼베’는 체코어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남편과 헤어진 그녀는 입으로 아이에겐 아빠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와의 사랑을 조심스럽게 바라기도 합니다. 그로 대변되는 남자들의 즉흥성과는 그 결이 다릅니다. 섬세하고 부드럽게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현실의 삶을 책임지려는 태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음악 작업이 끝나고 그가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을 때, 그녀는 그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말하죠. 당신과 함께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고. 그가 외로움에 못 이겨 자고 가라고 말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헤어진 남녀가 각기 다른 심리상태를 보이지만 교집합이 되는 지점도 있습니다.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입니다. 헤어진 연인이 그립지만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그 사람으로 인해 설레는 건 둘 다 같은 마음입니다.
3. 재회하는 남자
그는 음반 작업을 마치고 그녀를 떠납니다. 헤어진 여자 친구와 만나기 위해 런던으로 갑니다. 그녀가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요. 헤어졌던 애인이 그녀의 말처럼 그에게 돌아왔습니다. 그가 노래를 불러주면 다시 돌아올 거라는 말이 현실이 된 거죠. 해피엔딩임에도 불구하고 쓸쓸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아마도 음악으로 만난 두 커플은 이제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까닭입니다.
*영화 원스에 등장하는 헤어진 여자 친구는 존 카니 감독의 실제 애인이라고 합니다.
4. 재회하는 여자
그녀 역시 헤어졌던 남편과 재회합니다. 그와 함께 했던 순간을 간직한 채, 그에게서 선물 받은 피아노를 칩니다. 재회의 순간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듣습니다. 그녀는 그를 생각하는지 멀리 창밖을 바라봅니다. 이별의 아픔을 가진 두 사람이 함께 음악 작업을 하며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감정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극적인 장면이 없음에도 애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건 그와 그녀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아서 일 겁니다. 그는 헤어진 애인과 다시 재회를 했고, 그녀는 전 남편과 재회했지만, 정작 그와 그녀의 연인이 되지 못했으니까요.
*영화 촬영이 끝나고 그녀(마르케타 이글로바)와, 그(글렌 한사드)는 실제 연인 사이가 됐습니다.
5.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과의 재회
영화 원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 떠올랐습니다. 원스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거리에서 작은 녹음실에서 노래를 불렀던 달빛요정. 콘서트에서 처음으로 얼굴이 공개돼 팬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고 웃음 짓던 그는 슬픔과 좌절을 팔아서 큰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슬픔과 좌절이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처럼 여겨져 나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위로받던 그때가 생각나서인가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길을 걸어 봤던 때가 언젠가라며 나를 연애하라 노래 부르던 달빛요정, 짧은 생을 살고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노래는 영원히 남았습니다.
원스의 주인공이 청소기를 수리하며 노래를 불렀다면 달빛요정은 치킨 배달을 하며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달빛요정역전만루홈전과 재회합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배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더군
난 부끄러워
키 작고 배 나온 닭 배달 아저씨
영원히 난 잊혀질거야
아무도 날 몰라봤으면 해
난 버티지 못했어
모두 다 미안해
내게도 너에게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치킨런 중에서
-슬픔을 노래했지만 언제나 따뜻함과 웃음을 잃지 않았던 달빛요정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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