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에 오래 속해 있을수록 착각하기 쉬운 것이 있다.
“내가 이 일을 했다”는 감각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조직의 산출물이지, 개인의 흔적은 아니다. 보고서에는 이름이 남지 않고, 자료는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수정되거나 덮인다. 그 과정에서 개인이 어떤 판단을 했는지, 어디서 실패했고 무엇을 바꿨는지는 기록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기록의 축적 방식이다.
조직은 결과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완성된 문서, 승인된 기획, 통과된 보고가 기준이 된다. 하지만 결과만 남는 구조에서는 과정이 사라진다.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어떤 대안을 검토했는지, 어떤 시행착오를 거쳤는지는 공유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 지점이다. 결과는 그 순간의 성과로 끝나지만, 기록은 다음 판단을 위한 데이터가 된다. AI 시대에 이 차이는 더 커진다.
AI는 단순히 일을 빠르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다. AI의 성능은 결국 어떤 데이터를 얼마나 구조적으로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질문을 어떻게 축적했는지, 실험 결과를 어떻게 남겼는지, 실패를 어떤 형태로 기록했는지가 그대로 다음 결과의 질로 이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데이터는 거창한 빅데이터가 아니다. 연구 노트, 실험 로그, 설계 메모, 수업 설계 과정, 실패 사례 같은 개인의 기록이다. 이 기록들이 쌓여야 AI를 단순한 자동화 도구가 아니라 사고 확장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결과만 남기면 AI는 항상 새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기록이 남아 있으면 AI는 이전 사고 위에서 다시 생각할 수 있다.
AI가 보편화될수록 결과물 자체의 희소성은 빠르게 낮아진다. 요약, 초안, 분석은 누구나 만들 수 있다. 이 환경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어떤 문제를 반복해서 다뤄왔는가다.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
어떤 가설을 세웠는지
어디서 실패했고 무엇을 수정했는지
이 모든 것은 결과가 아니라 기록에 남는다.
최근에는 기록을 단순히 남기는 것을 넘어, 어떻게 구조화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바이브 코딩으로 웹앱이나 플랫폼을 만들며, 실험 결과와 설계 과정, 시행착오를 데이터처럼 쌓는 방식을 실험 중이다. 이건 브랜딩도, 포트폴리오도 아니다. AI 시대에 개인이 자신의 사고 과정을 외부에 고정하는 방법에 대한 실험이다.
조직의 이름은 언젠가 바뀌거나 사라진다. 프로젝트는 종료되고, 파일은 업데이트된다. 하지만 기록은 남는다. 그리고 이 시대에 남는 기록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다음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데이터가 된다. 결과보다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