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AI를 활용해 다양한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대부분이 업무나 일정 관리 시스템으로 그중에는 만들어 놓고 쓰지 않는 것들도 있다. 왜일까? 기능은 문제없었다. 속도도 빨랐다. 그런데 뭔가 부족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편리한 것과 즐거운 것은 다르다.
AI는 똑똑함을 만들지만, 재미는 만들지 못한다. 편리한 것과 즐거운 것은 다르다. 자동화된 것과 탐색하고 싶어지는 것도 다르다. AI 시대의 도구들은 대부분 똑똑해졌지만, 계속 사용하고 싶은 호기심과 재미는 결국 사람이 만들어야 하는 부분이다.
람스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1970년대, 디터 람스는 브라운의 전자제품을 디자인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그의 대답은 명확했다. 좋은 디자인은,
이해 가능하게 만든다 (makes a product understandable)
방해하지 않는다 (is unobtrusive)
정직하다 (is honest)
그리고 가장 유명한 원칙: "Good design is as little design as possible."
좋은 디자인은 가능한 한 적게 디자인하는 것
람스가 디자인한 브라운 계산기, 라디오, 면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것들은 복잡한 기술을 담고 있었지만, 사용자에게는 "이건 만져봐도 되는 물건"처럼 느껴졌다. 버튼 하나하나가 명확했고, 무엇을 하는 도구인지 즉시 이해할 수 있었다. 람스의 철학은 조너선 아이브를 거쳐 아이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AI 시대에 우리는 다시 람스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잡한 기술을, 어떻게 두렵지 않게 만들 것인가?
지금의 AI 도구들은 어떤 감정을 만들고 있을까
지금 우리가 쓰는 AI 도구들이 만드는 감정은 대개 비슷하다.
Notion AI로 회의록을 정리하면 결과는 나오지만, 어떤 부분을 생략했는지 알 수 없다.
ChatGPT로 코드를 받으면 작동은 하지만, 왜 이렇게 짰는지 물어보기 어렵다.
Midjourney로 이미지를 만들면 예쁘지만, 미묘하게 수정할 방법이 없다.
이건 내가 쓰는 도구가 아니라, 나를 채점하는 기계 같다. 똑똑할수록 더 무섭다. 정확할수록 더 멀어진다. 람스가 말한 "이해 가능한 디자인"의 정반대다. AI는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사용자는 결과만 받을 뿐, 과정을 이해할 수 없다.
재미는 사치가 아니라 인지 장치다
우리는 흔히 '재미'를 가벼운 감정으로 생각한다. 업무용 SaaS에서 재미는 부가 기능이고, 진지함이 본질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재미는 뇌가 보내는 매우 중요한 신호다. "이건 탐색해도 안전하다."
재미가 있을 때 사람은 더 많이 시도하고, 더 많이 실패하고, 더 많이 배운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이걸 '몰입'이라고 불렀다. 게임 디자이너들은 이걸 '러닝 루프'라고 부른다. 핵심은 같다. 사람은 통제감을 느낄 때 계속 탐색한다.
그리고 이 재미는 AI가 만들어주지 않는다. 아무리 강력한 언어모델도, 아무리 정확한 이미지 생성기도, 사용자에게 "만져봐도 된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재미는 사람이 설계하는 것이다.
람스가 브라운 계산기에서 했던 것처럼. 버튼의 크기, 피드백의 명확함, 되돌릴 수 있는 안전함. 이런 것들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디자이너가 만드는 감정이다. AI SaaS에서 재미는 기분 좋은 옵션이 아니라, 학습과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인지 인프라다.
AI SaaS는 도구가 아니라 실험실이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만들고 싶은 SaaS는 "정답을 주는 기계"가 아니라 "사고를 확장하는 실험실"이다. 실험실과 도구의 차이는 이것이다.
도구: 자동화, 결과, 하나의 답, 속도
실험실: 조작 가능성, 과정, 여러 대안, 되돌릴 수 있음
사람이 "아, 이거 만져볼 수 있네"라고 느끼는 순간, 그 시스템은 도구를 넘어 사고의 파트너가 된다.
람스가 오늘 AI를 만들었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AI가 복잡해 보이게 하지 말고, 사용자가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라."
"Good design is as little design as possible"은 AI 시대에 더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AI는 본질적으로 복잡하다. 수백억 개의 파라미터, 확률적 추론, 블랙박스 같은 내부 구조. 하지만 사용자가 마주하는 인터페이스는 그 복잡함을 덜어내야 한다. 사용자는 모델의 작동 원리를 알 필요가 없다. 대신 이것만 알면 된다.
내가 뭘 하고 있는가
뭘 할 수 있는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돌리는가
이 명확함을 만드는 건 AI가 아니라 사람이다.
재미를 설계하는 체크리스트
그래서 나는 시스템을 만들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되돌리기 버튼이 있는가? (실수해도 안전하다는 신호)
중간 과정을 볼 수 있는가? (AI가 뭘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용자가 개입할 여지가 있는가? (완전 자동이 아니라 협업)
결과에 대해 "왜?"라고 물을 수 있는가? (설명 가능성)
내가 만진 흔적이 남는가? (통제감과 소유감)
기능을 하나 추가할 때마다, 나는 이제 이 체크리스트를 먼저 본다. AI가 똑똑함을 담당하고, 나는 재미를 담당한다.
호기심이 남는 시스템
나는 오늘도 SaaS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기능보다 먼저 이 질문부터 던지게 된다. "이걸 쓰는 사람은, 과연 호기심을 느낄까?" 좋은 AI 시스템은 정답을 주는 게 아니라, 더 좋은 질문을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람스가 브라운 제품에서 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두려움 대신 호기심을 느끼는, 평가받는 대신 실험하고 싶어지는, 결과만 보는 게 아니라 과정을 탐색하고 싶어지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
AI는 복잡함을 만들고, 사람은 단순함을 설계한다. AI는 정확함을 만들고, 사람은 재미를 설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