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끝나도, 바로 작별하는 건 불가능했다.
쌓여온 세월이 있는 만큼 정리할 것이 많았다. 다행인 건, 그는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찍은 사진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사진 정리는 하룻밤 만에 끝났다. 감정이 끊어지니, 사진들은 더 이상 어떤 의미도 갖지 못했다. 울컥하거나 치받치는 순간 하나 없이, 이별 후 처음으로 치른 차가운 의식 같은 거였다.
다음은 돈 문제였다.
연애 초기, 그의 차를 폐차하면서 대신 내 소유의 중고차를 내줬다. 3년 내내 그가 내 차를 사용했고, 결국 그의 관리 소홀로 내 차도 폐차했다. 엔진 결함으로 발전한 걸 알았을 땐 살짝 헛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얼마 하지 않는 작은 중고차였지만, 내 수중에 남은 것은 폐차 부품값뿐이었다. 게다가, 빌려주고 아직 돌려받지 못한 돈도 남아 있었다.
고민 끝에 차량 사용에 대한 대가로 '(구매 당시 중고가 - 폐차 부품값) / 2'를 계산해 200만 원을 청구하기로 했다. 거기에 빌려준 돈까지 모두 합하자 청구 금액은 약 400만 원이 되었다.
카톡을 보내자마자 그는 부리나케 찾아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진짜 치사하게 구네. 이럴 줄 알았으면 네 차 안 썼지. 내가 너한테 쓴 돈도 절반 잘라서 청구하면 되는 거지?"
우스웠다. 둘이 함께한 건 뭔가를 먹는 것뿐이었고, 그조차도 내가 먹는 양의 두세 배 이상 그가 해치운 셈이었으니까. 본인의 식비와 쇼핑 빼고, 그가 내게 돈을 쓴 일은 드물었다.
끝까지 이기적인 모습에 정나미가 더 떨어진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될 대로 되라지. "그럼 중고가에서 폐차비 빼고 전부 줘. 차 사고 나는 정작 몇 번 타 보지도 못했는데."
내 말에 그는 눈치를 보더니 이내 말을 바꿨다. "그래도 3년간 차 쓰게 해 줘서 고맙지. 처음 계산한 대로 줄게."
바로 갚긴 어렵다기에 시간을 좀 주기로 했다. 그 사이, 내 가게도 급하게 새 주인을 찾았다.
그는 몰랐겠지만 나는 가게를 운영하며 무릎이 많이 상해 있었고, 그걸 깨달을 즈음엔 이미 그와 그런 이야길 나눌 필요 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게 착착 정리되었다. 딱 하나만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정리가 안 됐다. 마음이었다.
사진도, 돈도, 가게도 정리했는데, 잃어버린 내 인생의 3년은 어디에서도 돌려받을 방법이 없었다.
건조하게 흐른 이별 중에, 내 안에 남은 건 분노 뿐이었다.
돈이 아니라 내 시간과 헌신이 통째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사실이 밤마다 속을 뒤집었다. 간신히 잠에 들어도 화가 먼저 아침잠을 깨웠다.
억울했다. 그와 함께하기로 한 건 내 결정이었는데도, 모든 순간을 도둑맞은 것처럼 느껴진 건 왜였을까? 단순히 그의 거짓말에 속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보상도 없는데, 사랑을 주는 쪽이 내 성미에 맞다 여겼다. 돌이켜 보면 억울할 만큼, 스스로를 놓아버린 채 오래도 지냈다. 내 감정이나 욕망이 무시당해도 그를 채워줄 수 있다면 괜찮았다. 그때는.
그는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아이와 같았고, 나는 기꺼이 그의 연인이자 엄마를 자처했다. 어린아이는 자라지만 그는 자라지 않고 점점 더 나를 소모했다.
부족한 사람임을 몰라서 곁에 있은 게 아니었다. 부족함마저 품어내는 강인하고 따뜻한 연인이고 싶었다.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나의 가치를 증명할 것이라 믿었다.
그에게 쏟아내던 정성을 이별로 멈추고서야 마음이 움푹 꺼진 분지처럼 허기져있음을 알아차렸다.
조용히 그의 흔적을 지우고 집을 청소하며, 스스로에게 너무 오랫동안 무심했다는 걸 깨달았다. 감정은 이내 자책으로, 또 나에 대한 연민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그가 좋아하던 배달음식이 아니라 양배추 샐러드와 토마토계란볶음을 해 먹었다. 위장이 따끈한 게, 오랜만에 밥 한 끼 '제대로' 먹었다 싶었다. 자기 전 정성 들여 얼굴을 씻고, 시트팩을 붙였다.
사랑이 죽었어도 내 삶은 다시 일어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