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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자기 Jun 10. 2019

러시아에서 서구로

<나탄 밀스타인의 음악적 회고와 회상>을 읽고

최소한의 짐을 꾸려 떠나십시오. 언제 돌아올 수 있냐고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십 년 뒤, 혹은 이십 년 뒤, 아니면 반 백 년 뒤가 될 것입니다. 결국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는 당신이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는 어쩌면 현 지구 상에서 가장 이상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정치 체제가 들어섭니다. 보이지 않는 장막이 당신과 당신이 태어난 땅 사이를 가로막게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앞으로 벌어질 일입니다. 지금 당신이 할 일은, 이 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누구도 직접 이런 말을 해주진 않았을 것이다. 그토록 혼란한 나라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짐작할 수 있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러시아를 떠났다.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 샬리아핀, 발란신, 글라주노프... 수많은 러시아의 예술가들 말이다. 


그들 중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 사람은 누구였지?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있다. 그가 어떻게 되었냐고? 당연히 그는 음악을 썼다. 그는 인민의 작곡가가 되었고, 동시에 반인민, 반형식주의자라고 공격받았다. 프로코피예프는 1953년 3월 5일, 62세로 죽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스탈린이 죽은 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결국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은 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중 한 사람,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의 회고를 본다면 그 삶을 아주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정원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한 <러시아에서 서구로 : 나탄 밀스타인의 음악적 회고와 회상>이 바로 그 책이다.


<러시아에서 서구로>, 나탄 밀스타인/솔로몬 볼코프 지음, 이지영 옮김, 정원출판사, 2019




최근 온다프레스에서  <증언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을 복간했다. 이 책은 1906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97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를 솔로몬 볼코프가 엮어서 책이다. 같은 솔로몬 볼코프가 공동 저자로 참여한 <러시아에서 서구로>는 1925년 러시아를 떠나 다시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은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의 회고록이다. 


사실 나탄 밀스타인이 1925년 소련을 떠난 것은 망명이 아닌, 연주 활동을 위해 잠시 떠난 것이었다. 그는 소련 정부의 공식적인 허가까지 받았다. 정확히는 트로츠키의 부관 우보레비치가 얻어 준 서류였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는 예술적 정련과 문화적 선전을 위한 밀스타인과 호로비츠 동지의 외국 여행에 반대하지 않는다.


심지어 밀스타인은 당시 소련에서의 삶이 너무나 근사했기 때문에 서구로 가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1920년대 러시아에서는 시장경제를 일부 도입한 신경제정책NEP가 진행 중이었고, 밀스타인과 피아니스트 호로비츠는 러시아 전역을 돌며 연주 여행으로 유명해져 있었다. 인민 교육부 위원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는 두 사람을 두고 '소련 혁명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의 호의적인 기사를 쓰기도 한다. 그들은 유명했고, 돈이 있었다. 


그러나 저런 서류까지 받은 마당에 외국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결국 소련을 떠난 호로비츠와 밀스타인은 많은 러시아 이민자들처럼 처음에는 베를린에 머물렀고, 이후 파리로 옮겨갔다. 당시 러시아 이민자들은 고국과의 유대를 완전히 끊고 싶지 않아 했다. 호로비츠와 밀스타인 역시 러시아를 완전히 떠난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에 베를린, 파리 주재 소련 대사관들과도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소련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것을 초대 파리 주재 러시아 대사였던 크리스티얀 라콥스키에게 말하자, 라콥스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바보짓 하지 말게! 자네들은 아직 자본주의자들을 위해 충분히 연주하지 않았어!"
- <러시아에서 서구로>, 130쪽


그래서 그들은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편 라콥스키는 후에 소련으로 소환되어 결국 총살당한다.)

(왼쪽부터) 크리스티얀 라콥스키, 트로츠키




<러시아에서 서구로>에는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 샬리아핀, 조지 발란신, 미하일 체호프 등 수많은 러시아 이민 예술가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들은 소련 체제를 혐오하면서도 러시아 식당을 찾고, 러시안 티룸에서 만나 러시아어로 이야기했다. 물론 서구의 유명 인사들과의 관계도 쌓아간다. 호로비츠는 유명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딸인 완다 토스카니니과 결혼했고, 삼총사 중 한 명인 첼리스트 그레고리 퍄티고르스키는 프랑스의 유명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클린 드 로트쉴트과 결혼한다. 나탄 밀스타인 역시 카라얀, 토스카니니, 푸르트벵글러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협연을 하며, 벨기에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의 제자가 된다. 또한 그는 엄청난 음악 팬이었던 벨기에 엘리자베스 왕비를 만나기도 한다. 


삼총사 : (왼쪽부터) 나탄 밀스타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그레고리 퍄티고르스키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거물들의 이름을 읽다 보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음악과 정치의 관계는 과연 무엇인가? 국가에서 작곡을 철저히 통제하고 감시했던 소련까지 가지 않더라도, 서구에서 역시 음악과 정치의 연관성은 아무도 무시할 수 없다. 지휘자가 얼마나 정치, 권력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작곡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 많은 돈을 받고 곡을 위촉받기 위해 고심하는 스트라빈스키 모습은 책에서 속물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표현되긴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예술감독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신경전은 어떠한가. 결국 음악계의 공연 하나, 자리 하나에도 권력의 입김이 닿아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편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아주 조금 열린다. 스탈린 사후, 195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가 되면 본격적으로 소련과 서구의 문화 교류가 진행된다. 오이스트라흐, 리히터, 로스트로포비치, 에밀 길렐스 등과 같은 소련의 연주자들과 지휘자 므라빈스키가 이끄는 소련의 오케스트라가 서구로 향했다. 반대로 레너드 번스타인, 스토코프스키, 유진 오르먼디 등이 이끄는 오케스트라들이 소련에서 공연을 열었다.


(왼쪽부터)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물론 그들이 본 것은 서로의 진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은 장막 사이로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책에서 밀스타인은 오이스트라흐를 만난 일을 특별히 언급한다. 두 사람은 모두 오데사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바이올린 선생도 같았다. 오이스트라흐는 자신이 다섯 살이던 1914년, 첼로를 연주하던 밀스타인과 함께 보로딘의 현악사중주를 연주하던 것을 기억하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소련의 연주자들은 해외 공연에서 번 돈을 모두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주자들이 받을 수 있는 금액은 실제 보수의 10분의 1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해당 국가의 소련 대사관이 가졌다. 소련 정부 소유의 바이올린을 쓰던 오이스트라흐가 미국에서 자신의 바이올린을 구매하는 과정 역시 당시 소련 연주자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이다. 


그러나 오이스트라흐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선택지 앞에서 망설이는 밀스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것 봐요! 선택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결정을 할 수가 없고요. 그러니 입맛이 별로 없을 수밖에요! 내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결정을 대신해주고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입맛이 좋지요.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어요. 어디로 가라고 지시를 받으니까요. 그게 더 쉽게 사는 방법 아닐까요?" - <러시아에서 서구로>, 349-350쪽

 

밀스타인이 마주한 또 다른 소련인은 시인 옙투셴코였다. 당시 젊은 시인 옙투셴코는 반정부적인 시로 유명세를 얻고 있었다. 1962년 쇼스타코비치는 옙투셴코의 시 <바비 야르>등에 곡을 붙인 <교향곡 13번>을 초연하기도 한다. (바비 야르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근교의 협곡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 33,771명을 학살한 곳이다. 반유대주의가 있던 소련에서 옙투셴코의 시 <바비 야르>의 발표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밀스타인은 갱스터와 유행하는 농담을 좋아한다는 옙투셴코가 마치 오랫동안 갇혀있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밀스타인은 반대로 소련을 방문했을까?


그렇지 않다. 밀스타인은 1925년 떠날 때와 같이 여전히 일당 독재 국가였던 소련에 결코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함께 러시아를 떠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1986년, 61년 만에 다시 소련을 방문했다. 그의 나이 83살 때였다. 그가 이때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연주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는 아직까지도 회자된다.

호로비츠의 <트로이메라이> 연주, 1986년, 모스크바


돌아가는 것도, 돌아가지 않는 것도 결국 선택의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을 누가 하는가 이다.




<증언>과 <러시아에서 서구로>를 연달아 읽으니 마치 잃어버린 두 조각을 맞추어보는 느낌이다. 물론 이것이 모든 조각은 아니다. 아직 나오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으며, 이야기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아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도 잠시 언급된 루리에나 아브라모프와 같은 1920년대 활동했다 잊힌 러시아 아방가르드 음악가들처럼 말이다. 


그렇다 해도 최근 <러시아에서 서구로>나 쇼스타코비치를 다룬 책들(<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증언>)이 한국에서 연달아 번역 출간되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조각들을 찾아 모은다면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들을 하나둘씩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실제로 소련을 방문하고는 환상이 깨진 이들처럼, 연결한 조각들이 기대와 다르더라도 그 안에서 우리가 이야기해볼거리는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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