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자기 Aug 21. 2019

제1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만난 영화 (2)

음악, 권력을 만나다

음악은 순수한 예술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음악의 종류만큼이나 천차만별이다. 클래식 음악에는 음악 자체의 구성에 집중한 절대음악이 있고, 특정 대상을 묘사하거나 서사를 넣어 만든 표제음악이 있다. 이것을 넘어 체제 선전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갖고 쓴 음악이 있고, 이미 쓰인 음악이 체제 선전에 이용되는 경우도 있다. 작곡가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한 번 세상 밖으로 나온 음악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이용된다.



그렇다면 음악은 과연 언제부터 권력 가까이에 있었을까?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는 음악의 힘에 권력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주목했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 음악은 주로 종교의식에 사용되었다. 이 당시 종교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고, 이집트의 파라오는 단순히 정치적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음악은 이미 아주 오랜 옛날부터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것이다.


중세와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음악과 권력은 완전히 별개의 영역으로 생각할 수 없다. 교회 권력이 막강하던 중세 시대의 음악이란 대부분 교회음악이었다. 그 유명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궁정악사,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고,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든 역시 궁정악사로 일하는 동안 거취가 자유롭지 않았다. 혁명의 바람이 불고 시민, 민주주의의 개념이 성장하면서 시대가 달라졌지만 음악과 권력의 밀접한 관계는 그 형태가 바뀌었을 뿐 유효하다.


올 8월 열린 제1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는 음악과 권력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화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세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각각의 영화에서는 음악(예술)과 음악가(예술가)에게 가해지는 권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제1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로고




1. 끝나지 않은 작곡 - <하챠투리안의 칼춤>

유수프 라지코프 감독의 영화 <하챠투리안의 칼춤>은 하챠투리안의 대표작인 발레 <가얀느> 초연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하챠투리안은 발레 <가얀느>를 작곡한다. <가얀느> 초연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하챠투리안은 새 작품인 <교향곡 2번>을 작곡하려고 하지만, <가얀느>의 수정 요청이 계속해서 들어온다.


여기에 더해 발레 <가얀느>의 공연 허가권을 가진 푸슈코프가 등장한다. 하챠투리안과 같은 스승에게서 음악을 배운 푸슈코프는 음악적 재능이 부족했다. 그는 음악 대신 정치를 선택했고, 이제는 하챠투리안의 작품에 중요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하챠투리안의 발레 <가얀느>


영화 <하챠투리안의 칼춤>은 '창작에서 과연 어디까지가 예술가 본인의 영역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 하챠투리안에게 <가얀느>의 수정을 요구하는 인물은 한 둘이 아니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한 색소폰 연주자는 하챠투리안에게 <가얀느>에 색소폰 파트를 넣어달라고 부탁한다.


푸슈코프는 <가얀느>의 결말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그는 초연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하챠투리안에게 발레 마지막에 들어갈 춤곡을 작곡하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쓴 곡이 바로 그 유명한 <칼춤>이다.


https://youtu.be/rDnJ8JlPieU

하챠투리안 발레 <가얀느> 중 '칼춤', 마린스키 극장


그밖에도 영화에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하챠투리안과 함께 소련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였던 쇼스타코비치와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등장은 깜짝 선물과도 같다.


하챠투리안을 병문안 간 쇼스타코비치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거리의 악사와 함께 연주하는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미소 짓게 만든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음악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역시 쇼스타코비치와 하챠투리안의 대화에서 언급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바로 아르메니아 민족이다. 하챠투리안은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그의 많은 작품에는 아르메니아 선율이 녹아있다. 발레 <가얀느>나 <교향곡 2번> 역시 아르메니아 선율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특히 영화에서는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이 언급된다. 이 사건을 알게 된 하챠투리안은 자신이 앞으로 써 나가야 할 주제를 깨달았다고 하지만, 새로운 국제 정세 속에 그런 사건은 잊으라고 말하는 푸슈코프와 또 한 번 대립각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작곡가들. (왼쪽부터)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하챠투리안


영화가 끝나고 진행된 Q&A에서 유수프 라지코프 감독은 <칼춤>이 강제성을 갖고 작곡된 사실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어쩌면 예술가에게 완전히 자유로운 창작이란 꿈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특정 사회에 속한 예술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작품 역시 사회적 맥락 속에서 만들어지고 해석된다.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고, 계속 작업해나가기 위해서도 예술가는 저마다 감당해내야 하는 것이 있다.


창작 과정에서 들어오는 압력은 소련만의 일도 아니다. 지금도 많은 예술가들은 생계를 위해, 혹은 여타 이유로 창작 과정에서 개입을 받는다. 영화 <하챠투리안의 칼춤>은 그저 한 작곡가의 삶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 예술가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하챠투리안의 칼춤>, 유수프 라지코프 감독, 2018




2. 네가 원하는 걸 말해야 해 - <화이트 크로우>

1961년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은 공연 투어를 위해 파리에 도착한다. 발레단이 파리에서 일정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인 런던으로 떠나기 위해 파리 르 부르제 공항으로 향한 1961년 6월 16일, 한 무용수가 망명한다. 그의 이름은 루돌프 누레예프이다.


루돌프 누레예프, 1961


랄프 파인즈 감독의 영화 <화이트 크로우>는 1938년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태어난 누레예프가 마린스키 발레단의 무용수가 되는 과정과 1961년 파리에 도착한 누레예프의 모습을 교차해 보여준다. 영화 속 누레예프는 예술을 사랑하는 예술가였다. 파리에 도착한 그는 가장 먼저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 테오도르 제리코의 압도적인 그림 <메두사 호의 뗏목>를 감상한다.


<메두사 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 1819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냉전이 한창이던 1961년, 마린스키 발레단의 일거수일투족은 관심과 감시의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레예프는 가장 먼저 프랑스인들에게 다가갔고, 파리의 다양한 문화를 즐긴다. 결국 그는 감시자의 눈밖에 난다. 발레단의 다른 무용수들이 런던으로 향하는 공항에서 누레예프는 홀로 모스크바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겉으로는 크렘린에서 특별 공연을 하라는 이유였지만 이는 명백한 위험 신호였다.


<화이트 크로우>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장면은 바로 파리 르 부르제 공항에서 누레예프가 망명을 하는 모습이다. 런던행이 막히고 모스크바로 돌아가길 기다리던 누레예프가 파리에서 교류한 지인들의 도움으로 망명하는 과정은 숨 가쁘게 전개된다. 외교 관례상 누레예프가 먼저 망명 의사를 표시해야 했기 때문에 도움을 준 지인(클라라 상)은 누레예프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원하는 걸 말해야 해.


이에 누레예프는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말한다. 망명 의사를 표시한 뒤 누레예프는 다시 한번 정식으로 선택의 문 앞에 선다. 이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떠나 처음 발레 학교에 입학하던 장면이다. 결국 그는 망명을 선택한다.


물론 망명 후에도 루돌프 누레예프의 삶은 이어진다. 그는 영국 로열 발레단에서 공연하고, 1983년부터 1989년까지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안무가이자 감독을 지낸다. 누레예프가 안무를 맡은 <백조의 호수>, <로미오와 줄리엣> 등은 큰 성공을 거두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82년 오스트리아의 시민권을 취득한 누레예프는 망명한 지 28년 만인 1989년 러시아 방문이 허가된다.


https://youtu.be/92YhJ4ZVmCg

프로코피예프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중 '기사의 춤',  안무 루돌프 누레예프, 파리 오페라 발레단


영화 <화이트 크로우>는 타타르 국립 오페라 발레 극장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는 올렉 이벤코를 누레예프 역으로 캐스팅하여 실제 발레 공연을 보는 듯한 생동감 넘치는 화면을 보여준다. 감독 랄프 파인즈는 발레 학교 교수인 알렉산드르 푸시킨 역을 맡아 러시아어로 연기한다.


https://youtu.be/BklqjGWxNMs

영화 <화이트 크로우> 트레일러,  랄프 파인즈 감독, 2018




3. 비공식 협력자 - <동독의 광부 가수 군더만>

1990년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었다. 분단 시절,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Staatssicherheitsdienst의 약자)에서는 대략 18만 명에 달하는 비공식 협력자(민간인 비밀정보원)가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가까운 지인, 심지어는 가족의 행동을 슈타지에 밀고했다. 그리고 여기 슈타지의 비공식 협력자이자 광부, 그리고 가수였던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동독의 광부 가수 게르하르트 군더만이다.


게르하르트 군더만, 1994


영화 <동독의 광부 가수 군더만>은 감시자와 감시당한 자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통일 후, 슈타지의 감시 피해자들은 기록 보관소에 보관된 자신의 피해자 파일을 열람할 수 있게 된다. 군더만의 지인이자 군더만이 감시했던 한 사람은 그의 앞에 두툼한 슈타지 문서를 내보인다. 군더만은 순순히 자신이 슈타지의 비공식 협력자였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 일에 대해 "잘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 속 군더만은 이 말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슈타지 비공식 협력자가 아닌 가수 군더만은 어떤 인물일까? 영화 속에는 군더만의 다양한 노래가 등장한다. 일상을 담은 소박하면서도 시적인 가사, 광산 굴착기 기사라는 직업적 특성을 살린 진솔한 가사는 멜랑꼴리 하면서도 담담한 선율에 맞추어 관객의 귀를 사로잡는다. 군더만의 노래를 단 한 곡이라도 들어본다면 왜 그가 사랑받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https://youtu.be/m8arhUe-Flk

<Gras>, 게르하르트 군더만


그러나 군더만은 가수로 유명해진 뒤에도 음악을 생계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음악만큼이나 군더만이 광산 굴착기 기사로 일하는 장면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부조리한 광산 경영으로 인해 위험에 노출된 광부의 삶은 군더만 자신의 삶이기도 했다. 거대한 굴착기 운전석에 앉아 녹음기로 떠오르는 가사를 기록하는 모습은 광부이자 가수인 군더만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 슈타지의 비공식 협력자로 일한 것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군더만은 자신의 가해자 파일을 읽고 진상을 마주한다. 군더만 역시 다른 비공식 협력자의 감시를 받은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기록 보관소에서 군더만은 자신의 피해자 파일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죄책감과 양심의 문제이다. 군더만은 곧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된다.


영화 <동독의 광부 가수 군더만>,  안드레아스 드레센 감독, 2018


군더만은 광산 굴착기 기사, 가수, 슈타지 비공식 협력자, SED 당원 등 다양한 사회적 역할만큼이나 다양한 선택의 길에 선다. 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매일매일 마주하는 선택의 길. 어쩌면 평생을 짊어져야 할지도 모를 교차로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https://youtu.be/kYkXKIU7OAA

영화 <동독의 광부 가수 군더만> 트레일러




영화 <화이트 크로우>에서 누레예프는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예술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많은 역사적 사례가 보여주듯 경계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예술가라면 결국 권력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다. 그렇다면 권력과 예술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음악과 권력의 관계를 보여주는 세 영화에서는 권력과 마주한 세 명의 예술가가 비친다. <하챠투리안의 칼춤>은 압박 속에서 명곡이 태어나는 과정을, <화이트 크로우>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려 망명을 선택했지만 끝까지 예술가로 남은 한 무용수의 이야기를, <동독의 광부 가수 군더만>은 죄책감과 양심의 문제를 안고 살아간 음악가의 선택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선택은 각자 처한 상황만큼이나 달랐지만, 세 영화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지금도 많은 예술가들이 권력의 압박을 받고 있다. 정치권력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사회가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마치 음악이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처럼 말이다. '음악은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가'는 수백 년 전부터 중요한 문제였고, 이 질문에 답해가는 과정 속에서 음악은 발전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묻는다. 음악은 과연 무엇을 표현해야 할까? 음악은 과연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을까?






이 글은 2019년 8월 20일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3354


매거진의 이전글 제1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만난 영화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