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자기 Sep 10. 2019

여성, 영화로 말하다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을 담은 영화

올 8월 29일부터 9월 5일까지 메가박스 상암 월드컵 경기장과 문화비축기지에서는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열렸다.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이번 영화제에서는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의 다양한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그중 여성의 시각에서 사회적인 이슈를 해석한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1. 개막작 -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

영화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 테오나 스트루가르 미테브스카 감독, 2018


텅 빈 수영장 한가운데에 주인공이 서있는 영화의 시작 장면이 인상적이다. 영화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는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마케도니아의 작은 마을 슈티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32살, 역사 전공의 페트루냐는 아직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직장을 갖지 못하고 부모님과 함께 산다. 페트루냐의 어머니는 여차저차 그에게 면접 자리를 알아봐 주지만 20대라고 나이를 속이라고 말한다. 투덜대며 집을 나선 페트루냐는 결국 친구에게 원피스를 빌려 입고 면접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면접에서 패트루냐는 성희롱을 당한다.


그런데 면접이 끝나고 돌아가는 페트루냐 주위에 상의를 탈의한 남성들 한 무리가 지나간다. 그리스 정교에서 구세주 공현 축일에 하는 행사를 위해서이다. 이 행사에서 신부는 나무 십자가를 강에 던지고 마을의 남자들은 십자가를 잡기 위해 차가운 강물 속에 뛰어든다. 십자가를 가장 먼저 잡은 사람에게는 한 해 동안 행운과 번영이 약속된다는 의미이다. 페트루냐는 이 무리에 떠밀려 강가로 향한다. 


다리 위에서는 신부가 기도를 하며 십자가를 던질 준비를 한다. 다리 밑에서 남성들은 어서 십자가를 던지라고 신부를 보챈다. 페트루냐는 다리 밑에 서서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이들을 지켜본다. 마침내 신부가 십자가를 던지고, 남자들이 강에 뛰어든다. 십자가는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때 페트루냐가 강물 속에 뛰어든다. 십자가를 처음 잡은 사람은 바로 페트루냐였다.

https://youtu.be/zzxThyRQ9lE

영화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 트레일러


그런데 강물에 뛰어든 남자들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 그들은 페트루냐가 높이 치켜든 십자가를 뺏더니 자신이 먼저 잡았다는 듯 행동한다. 이 모습에 신부는 화를 내며 어서 그 십자가를 페트루냐에게 돌려달라고 말한다. 남자들은 오히려 페트루냐가 십자가를 '뺏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강물에 던져진 십자가를 가장 먼저 잡은 사람이 페트루냐라는 사실은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무언가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결국 페트루냐는 십자가를 다시 빼앗아 도망친다. 행사장에서 일어난 이 소동은 TV에 방송되고, 심지어 페트루냐는 경찰서로 가게 된다. 페트루냐는 경찰에게 자신이 체포된 거냐고 묻지만 그 누구도 이 질문에 명확히 답해주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신부는 대주교가 '규칙을 무너뜨린 것'에 화를 냈다고 경찰서장에게 말한다. '십자가는 남자들만 잡을 수 있다.'는 규칙 말이다. 행사장에서 강물에 뛰어들었던 남자 무리는 경찰서 앞으로 몰려든다. 페트루냐가 '뺏었던' 십자가를 돌려받기 위해서이다.


'십자가는 남자만 잡을 수 있다'라는 종교 행사의 규칙을 깼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소동이 벌어질 일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일들에 당혹스러운 한편 머릿속에서는 이 질문이 떠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치며 질문을 던지는 영화 속 여성 리포터는 제일 마지막에 페트루냐의 오랜 친구와 인터뷰한다. 인터뷰이는 "신이 만약 여자여도 이랬을까요?"라고 묻는다. 리포터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며 마케도니아는 말 그대로 진정 '영원의 나라'라고 말한다. '영원히 중세 암흑기에 갖힌 나라' 말이다.


영화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에서 페트루냐가 잡았던 십자가는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남성만이 잡을 수 있었던 혹은 잡아야 했던 무언가를 여성이 잡았을 때의 반발. 이것은 비단 마케도니아만의 일이 아니다. 




2. 아우슈비츠의 여성들 - <마지막 무대>

영화 <마지막 무대> 포스터, 반다 야쿠보프스카 감독, 1948


폴란드의 여성 영화감독 반다 야쿠보프스카의 1948년 개봉작 <마지막 무대>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여성 수감구역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임산부인 헬레나가 아우슈비츠로 끌려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점호 도중 헬레나는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어 쓰러지고, 이로 인해 점호는 길어진다. 지친 몸으로 하염없이 서있는 수감자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체중을 나눈다.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은 앞으로 등장할 수용소 내 여성 수감자들의 연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여성 수감구역은 마치 하나의 사회이다. 수용소를 총감독하는 나치 대원 이외에 수감자들은 다른 수감자들을 감독하는 반장, 통역사, 의사, 간호사, 심지어는 지휘자와 단원 등의 역할이 나뉜다. 때때로 이 역할은 특정 수감자에게 권력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수감자 중 선출되는 반장은 다른 수감자에게 명령을 내리고, 줄무늬 수감복 위에 블라우스 등의 일반 옷을 입으며, 수감자들이 처음 아우슈비츠에 끌려왔을 때 빼앗긴 소지품을 나누어 가진다. 또한 후반부에는 다른 수감자를 고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권력 역시 그들 자신도 역시 수감자라는 사실, 따라서 언제든지 가스실로 끌려갈 수 있는 운명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이 위계는 또 하나의 비극이다.


영화  <마지막 무대>가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장소는 수용소 병동이다. 이곳은 특히 여성들의 연대가 돋보인다. 헬레나의 출산 과정과 태어난 아기를 살리기 위한 행동, 가스실로 보내는 인원을 선별할 때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병동의 노동력으로 데려가는 장면, 전쟁 종전이 가까워지자 외부와 접촉하기 위해 남성 수감자들과 협력하는 과정은 바로 이 병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주목할 것은 수용소 내 다양한 구성원이다. 폴란드인 통역사 마르타 바이스, 러시아인 의사 유제니아, 독일인 간호사 안나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영화 후반에는 참전했다가 붙잡힌 러시아의 여성 군인들이 등장한다. 전쟁 포로 수용소로 보내달라는 그들의 당당한 요구와 묵살은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떠올리게 한다. 


전쟁이 독일에 불리하게 끝나가면서 나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말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수감자들은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려 하고, 이 노력은 몇몇 희생을 가져온다. 하나 둘 희생되는 수감자는 남은 이에게 연대의 끈을 넘긴다. <마지막 무대> 속 여성 수용소는 죽음, 공포, 부조리와 동시에 여성들의 연대가 살아있는 곳이다. 


<마지막 무대>의 감독 반다 야쿠보프스카는 실제로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공동 각본가인 게르다 슈나이더 역시 야쿠보프스카 감독이 아우슈비츠에서 만난 수감자였다. 영화 촬영 역시 실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진행되었다. 따라서 1948년작 <마지막 무대>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경험이 녹아있는 생생한 생존기이다. 이 생존의 중심에는 다양한 국적, 인종, 계층의 여성이 있다.




1997년 시작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올해로 21회를 맞이했다. 이번 영화제에는 총 31개국 119편의 영화가 소개되었다. 그중 단 한 편을 보더라도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세상은 불합리하고, 답답하며, 때때로 공포심마저 느끼게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바라보고 경험하고 느낀 세계. 이것에 대해 서로 이야기할 때 우리의 세계는 조금 더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우리의 세계는 과연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을까. 그 길을 함께할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앞날이 더욱 궁금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1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만난 영화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