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동쪽으로
올 10월 22일부터 11월 8일까지 제11회 서울국제음악제(SIMF)가 열린다. 이번 음악제의 주제는 '인간과 환경'이다. 특히 한국-헝가리, 한국-폴란드의 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들이 열려, 리스트와 바르톡과 같은 헝가리 출신 작곡가와 바인베르크, 펜데레츠키와 같은 폴란드 출신 작곡가의 음악을 만날 수 있다. 음악제는 평소 공연장에서 접하기 힘든 작곡가, 곡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번 서울국제음악제 역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중 10월 25일 일신홀에서 열린 듀오 리사이틀 '홀로코스트'는 사전 예약금을 받아 예매 후, 현장에서 티켓 수령 시 예약금을 돌려주는 '노쇼 캠페인'이라는 특별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한 마디로 무료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공연을 기다린 이유는 바로 폴란드 출신 작곡가 미에치스와브 바인베르크의 곡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19년 출생으로 올해 탄생 백 주년을 맞는 미에치스와브 바인베르크는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의 유대인이다. 그의 아버지 슈무엘 바인베르크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극장에서 일하던 음악가로 바인베르크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며 자랐다. 십대에 이미 극장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한 바인베르크는 이후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공부한다. 그러나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바인베르크는 여동생과 함께 동쪽으로 피난을 떠났지만 여동생은 신발 때문에 발이 아프다고 다시 부모님에게로 돌아갔다. 이후 바인베르크는 다시는 부모님과 여동생을 만나지 못한다. 그의 가족은 모두 나치에 살해당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미에치스와브 바인베르크뿐이다. 홀로 동쪽으로 떠난 바인베르크는 소련 국경에 도착한다. 여기서 그의 이름은 서류를 검사하던 소련 군인이 알아듣기 힘든 '미에치스와브'에서 흔한 유대인 이름인 '모이세이'로 바뀐다. 이후 그는 40년 이상 '모이세이 바인베르크'로 살게 된다.
바인베르크는 당시 소련령이었던 현 벨라루스의 민스크에 도착한다. 그는 민스크 음악원에서 2년간 작곡을 공부하고, 1941년 6월 21일 그의 졸업 작품인 <교향시>가 일리야 무신의 지휘로 공연된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뒤인 6월 22일 새벽, 독일은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공격한다. 또다시 전쟁에 휘말린 바인베르크는 동쪽으로 대피한다. 이번에 그는 현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로 향하고, 여기서 유명한 유대인 배우이자 연출가 솔로몬 미헬스의 딸인 나탈리야-봅시 미헬스를 만나 결혼한다.
그리고 1943년, 바인베르크의 음악 인생에서 중요한 인물이 나타난다. 바로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이다. 쇼스타코비치는 1943년 바인베르크의 <교향곡 1번> 악보를 받아보고는 그를 모스크바로 초대한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바인베르크는 쇼스타코비치와 만나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1975년 쇼스타코비치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쇼스타코비치와 바인베르크의 관계는 각별했다. 두 사람은 서로 작곡한 곡을 보여주고, 함께 피아노로 연주하며 때로는 식사를 함께 했다. 또한 쇼스타코비치는 바인베르크의 곡을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고, 공연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바인베르크는 쇼스타코비치의 제자는 아니지만, 그와 쇼스타코비치의 친밀한 관계로 종종 쇼스타코비치의 제자로 오해받기도 했다. 이후 스탈린 사망 직전 '의사들의 음모' 사건을 대표로 점점 더 심해지던 반유대주의의 여파로 1953년 2월 바인베르크는 체포되기도 하지만, 다행히 스탈린의 사망 직후 풀려나고 1996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작곡가로 활동한다.
10월 25일 일신홀에서 열린 클라리네티스트 피터스타인과 피아니스트 라쉬코프스키의 듀오 리사이틀 '홀로코스트'는 총 4개의 클라리넷과 피아노 듀오 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부에서는 풀랑의 <클라리넷 소나타>와 브람스의 <클라리넷 소나타 1번>, 2부에서는 바인베르크의 <클라리넷 소나타>와 샤를-마리 비도르의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서주와 론도>가 연주되었다. 총 네 개의 클라리넷 곡을 한 연주회에서 만나는 것도 드문 기회였지만 무엇보다 바인베르크의 음악을 한국에서 접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의미였다.
바인베르크 <클라라넷 소나타> 1악장의 시작은 클라리넷의 감미로운 소리가 한껏 발휘된 서정적인 선율이다. 이어서 클라리넷과 피아노의 아기자기한 대화가 흘러가지만, 이 대화의 중간에는 마치 타악기처럼 한음 한음 강하게 연주하는 피아노와 그 위를 부유하는 클라리넷의 노래가 끼어든다. 그러나 감정은 폭발할 듯 폭발하지 않고, 다시 1악장의 시작을 알리던 부드러운 선율로 돌아오며 끝난다.
2악장은 마치 어린 시절 천진난만한 풍경이 펼쳐지는 듯한 선율로 시작된다. 난간에 걸터앉은 어린아이의 다리가 앞뒤로 흔들리는 것처럼 피아노와 클라리넷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평화로운 풍경을 그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클라리넷의 강한 고음과 피아노의 타건에 의해 갑작스럽게 중단된다. 곧이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지지만 한 번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되는 평화는 불안하다. 유대 민속 선율이 연상되는 멜로디가 한동안 곡의 분위기를 지배하며 감정적 중심을 이루지만 2악장 역시 다시 초반의 풍경으로 돌아오며 끝난다.
앞선 두 악장과 달리 3악장은 느리고 무거운 피아노 연주로 시작된다. 무겁게 짓누르는 피아의 연주 사이 클라리넷이 나타나 자신의 감상을 풀어놓는다. 클라리넷의 이야기를 피아노가 밑에서 묵묵히 받쳐주며 감정은 더욱 고조된다. 그러나 클라리넷의 부드러운 선율은 고조된 감정을 감싸듯이 한 폭 한 폭 스스로 갈무리하며 곡이 끝난다.
이번 공연에서 바인베르크의 곡은 <클라리넷 소나타> 하나로 바인베르크 음악을 잠깐 맛보는 정도로 끝났다. 하지만 클라리네티스트 피터스타인과 피아니스트 라쉬코프스키의 호연과 온전히 음악에 몰입할 수 있는 소규모 공연장이라는 공간에서 음악과 더욱 밀접하게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서울국제음악제라는 특별한 기회가 아니었다면 바인베르크의 곡을 이렇게 만날 수 있었을까.
바인베르크는 교향곡, 실내악, 오페라 등 전통적인 클래식 음악 장르뿐만 아니라 생계를 위하여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분야의 곡을 쓰기도 했다. 소련판 <위니 더 푸>인 <비니 뿌흐>는 바인베르크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음악 작업이다. 또한 실제 아우슈비츠 수감자였던 조피아 포스미시의 희곡을 바탕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비와 수감자의 이야기를 다룬 그의 오페라 <더 패신저>는 20세기의 역사적 비극을 다룬 중요한 작품이기도 하다.
최근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등을 중심으로 바인베르크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 한국 공연장에서는 미에치스와브 바인베르크라는 이름을 만날 기회가 드물지만, 바인베르크는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등과 함께 20세기 소련에서 활동한 중요한 작곡가이다. 폴란드 출신으로 생애 대부분을 소련에서 활동한 유대인 작곡가라는 복잡한 정체성은 20세기의 역사적 굴곡을 그대로 담고 있기도 하다. 또한 바인베르크의 음악은 전통적인 서양음악의 기반 위에 작곡가 자신의 내면적 색채가 담긴 힘을 갖고 있다. 바인베르크를 재조명하는 흐름이 한국으로도 이어져 그의 더 많은 곡을 공연장에서 만날 수 있기 바란다.
<참고 문헌>
- David Fanning, Mieczysław Weinberg : In Search of Freedom, wolke, 2nd edition, 2019
- 2019 서울국제음악제 프로그램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