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자기 Oct 04. 2020

사랑에 관하여

사랑은 도대체 뭘까?

나는 요즘 매일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아마 지금 거의 1년째 작업하는 만화가 어떤 의미에서 사랑에 관한 작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화 제목에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매체에서 본 사랑의 모습은 대개 젊은 두 남녀가 연애를 시작하여 갖은 역경을 넘어 결혼에 골인하는 류의 이야기였다. 모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 포털 사이트에서는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온갖 키스 장면에 주목하여 특이한 장면마다 00 키스라는 이름을 붙여 이것이 유행처럼 한동안 매체를 휩쓸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왜인지 이런 스킨십이나 남녀 간의 연애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또한 결혼에 골인하는 결말 역시 내 기준에서는 그다지 해피엔딩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왜일까? 아마 내가 주변에서 본 수많은 결혼생활들, 결혼식을 올리고 난 이후 이어지는 수십 년 간의 지난한 세월이 매체에서 보이는 해피엔딩과 지극히 거리가 멀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의 무의식에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것이 사랑이라면 난 사랑할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 사랑에 대한 내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라고 느끼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그 첫 번째 계기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었다. 나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좋아한다. 사실 이 감정은 '좋아한다'는 단어보다는 살짝 더 강해서 '좋아한다'와 '사랑한다'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 러시아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 시간을 되돌아보면, 아마도 평생 동안 들었다 쉬었다를 반복하며 계속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좋아할 것 같긴 한데, 그렇다면 이 감정은 '사랑'에 가깝지 않을까. 만약 이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같은 종인 인간에게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무생물, 더 나아가 손으로 잡아 묶어둘 수 없는 추상적인 음악에도 붙일 수 있는 감정인 것이다.


두 번째 계기는 우리집 막내 해피의 입양이었다. 해피는 4년 전, 우리집으로 데려온 개다. 데려오기까지 약간의 곡절이 있었지만 어찌어찌하여 우리집 막내가 되었고, 지금은 네 살이 되었다. 해피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랑이다. 원래 난 겉으로 감정표현을 잘하지 않아서 처음 해피를 데려왔을 때 좋다는 표현을 다른 가족 구성원 앞에서 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해피를 대하는 내 모습을 보고 다른 가족 구성원이 "그렇게 좋아?"라고 물어도 "응, 좋아."라고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개 한정이다..^^ 사람한테는 아직도 이렇게 못한다.) 여하튼 해피가 날 물어도 난 해피를 사랑한다. 짖어도 사랑하고, 똥 싸고 밟아 놓아도 사랑한다...


세 번째 계기는 첫 번째 계기와 관련이 있는데, 바로 솔로몬 볼코프라는 작가 엮은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이라는 책에 나온 한 대목이다.(참고로 이 책에서 회고의 주체는 쇼스타코비치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중 <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 혹은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몇 년 전에 플로렌스 퓨 주연으로 개봉한 영화 <레이디 맥베스>가 이 오페라와 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두 작품의 원작은 바로 러시아의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라는 젊은 여성(상인의 부인)으로, 그는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엄격한 시아버지와 함께 살며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일 때문에 집을 비운 사이 세르게이라는 새 일꾼과 사랑에 빠져 결국 시아버지를 죽이고 남편을 죽이는 등... 이 주된 내용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소설로 오페라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을 썼다. 곡 완성은 1932년 말, 쇼스타코비치가 1906년생이니까 그의 나이 26살 때였다. 그리고 이 작품은 1934년 초연 이후 러시아(당시 소련) 안팎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데, 1936년 엄청난 곡절을 겪게 된다... 


다시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으로 돌아와서, 내가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 대목은 바로 이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과 관련하여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이자 비평가 솔레르틴스키가 한 말에 관한 내용이다.

"사랑은 솔레르틴스키가 가장 좋아한 주제 중 하나였다. 그는 사랑 이야기를 한번 꺼내기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지치지 않고 떠들어댄다. 극히 다양한 수준의 사랑에 대하여, 지고한 사랑에서 가장 저열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았다.... (중략).... 
 솔레르틴스키는 사랑이란 위대한 천부적인 재능으로서, 사랑하는 법을 아는 사람은 배를 건조하거나 소설 쓰는 법을 아는 사람처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었다. 이런 의미에서 르보브나(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는 천재다. 사랑에 대한 열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녀는 그걸 위해 무엇이든, 심지어 살인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천재다." 

- 솔로몬 볼코프 엮음, <증언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김병화 역, 온다프레스(2019), 280-281


나는 사랑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는 글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은 세간에서 당연시하는 형태로 누구나 특정 나이대에 특정 대상과 당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특별한 재능으로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 심지어 '천재'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사랑에 대한 내 생각을 확 바꾸었다. 



사랑에 대한 생각이 바뀐 마지막 계기는 최근에 읽은 석영중 교수님의 <매핑 도스토옙스키> 한 부분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생애 마지막에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라는 정말 갓갓대박대박... × 백만 배... 작품을 썼다. 이 소설은 너무 대박이라 진짜 또 읽고 싶은데.... 여하튼 <매핑 도스토옙스키>에서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다루는 부분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사랑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솟구쳐 나오는 자연스러운 욕구다. 그러나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학습이 필요하다. 소설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을 대변하는 노수도사 조시마 장로는 말한다. <사랑은 얻기 힘든 것입니다. 구하려면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우연히 어떤 순간이 아니라 어느 때에나 실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하는 것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으며 악당들조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 석영중, <매핑 도스토옙스키>, 열린책들(2019), 406-407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노력학습이 필요하다'는 말 역시 이전에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가 없는 사람처럼 사랑과 내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것 역시 이 '노력'과 '학습'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평생에 걸쳐 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을 학습한다고 생각하니 주변에 있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인식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사랑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기도 한다. 아주 가까운 주변에서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던 사랑의 모습도 새로이 다시 보게 되었다. 아마 나는 이러한 사회적 단위를 앞으로 스스로 만들 일은 없을 것이기에 이 사랑과는 될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렇지만 사랑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만 존재하는 감정도 아니고, 같은 공간이나 시간을 공유하는 것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고, 평생에 걸쳐도 알지 못할 사랑의 형태 역시 너무 다양해서 나는 요즘 거의 매일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현재 작업하고 있는 만화는 어떤 오래된 원작을 각색해서 그리는 것인데, 이 원작에는 처음에 은유?적인 사랑이 등장했다가 나중에 이것이 직접적인 사랑으로 모습을 바꾼다. 특히 나는 전자의 은유적인? 알쏭달쏭한 '사랑'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후반에 등장하는 직접적인 사랑을 위한 도구일까, 아니면 이것 역시 어쩌면 은유가 아닌 직접적인 사랑의 새로운 모습일까. 계속 고민 중이다. 


이 사랑이 어떤 형태로 결말을 맺을지 그리고 있는 나도 아직 모르지만 여하튼 사랑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만화를 그리는 것도 결국 내가 그리고 싶은 이야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진짜로 만화 못 그린다. 너무 힘들어....!!) <작은 일기장>을 시작한 것 역시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어딘가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이다. 거슬러 거슬러 생각해보면 이 모든 일들이 사랑이 없었다면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와우, 그런 의미에서 정말 대단하네, 사랑.



2020.10.03. 도자기

매거진의 이전글 소셜 딜레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