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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자기 Mar 18. 2022

만화『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제작기 05

작업 B컷 대공개!

지난번까지 총 4편에 걸쳐 만화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작업 과정을 글로 소개해보았다.

https://brunch.co.kr/@dozagi925/65


오늘은 그 마지막 이야기! 만화 작업 과정에서 자연스레 쌓이기 마련인 작업 B컷과 콘티들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1. 동화책? 만화책?

사실 만화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작업을 시작하면서 고민했던 것은 이 만화를 어떤 형태로 그릴 지였다. 지난 글에서도 소개했듯이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이탈리아 민담이다.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역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이탈리아 민담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만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참고한 책 중에는 교원에서 출간한 동화책 형태의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도 있다. 



그래서 작업을 시작할 당시 그림의 방향성을 잡는 과정에서 고민했다. 

나는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동화가 아닌, 만화로 그리고 싶었다. 일단 나는 만화가이고, 내가 그리고 싶은서사는 동화책보다는 만화로 표현하는 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전에 캐릭터 구상 등의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간단히 이야기의 시작을 그림과 함께 정리해보기로 했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1) 러프한 선화

먼저 채색을 하지 않고 러프하게 그림과 글로 줄거리를 정리해보았다.

만화를 염두하고 있기 때문에 인물의 대사도 넣어보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아이디어 구상이기 때문에 말풍선까지 그리진 않았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 니네타의 캐릭터 디자인 방향성을 잡았다.


(2) 채색

주인공의 캐릭터 디자인 방향성을 잡았다면 이번에는 색을 정할 차례이다. 만화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는 컬러 만화이기 때문에 색이 아주 중요하다. 특히 이 만화에는 '오렌지'라는 핵심 소재가 등장한다. 새콤달콤한 오렌지는 단순히 색뿐만 아니라 만화를 보았을 때 정말 상큼한 오렌지의 향까지 연상되도록 그리고 싶었다.


상큼한 오렌지 향이 가장 강하게 느껴질 때는 언제일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손으로 직접 오렌지의 껍질을 처음 깔 때가 아닐까. 손톱으로 오렌지 껍질을 눌렀을 때 '치익-'하고 즙이 나오는 그 순간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색을 넣어 그림을 다시 그려보기로 했다. (1)의 러프한 선화에서보다 (2)의 그림이 조금 더 생동감이 느껴진다. 확실히 이 만화는 색을 넣어 그려야 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주인공 니네타의 의상 색을 정했다. 많은 고민 끝에 니네타의 신분을 공주로 유지하기로 했지만, 의상 색은 신중히 고르고 싶었다. 예를 들어 니네타에게 분홍색 옷은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색을 의상에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초록색이 떠올랐다. 초록은 오렌지 나무에서 볼 수 있는 색이기도 하다. 또한 오렌지색과 초록색은 색 조화도 괜찮았다. 그렇게 해서 니네타는 초록색 옷을 입게 된 것이다.




2. 사실 니네타는 00가 될 수 도 있었다.

'왕자가 모험 끝에 공주를 구해 결혼한다.'는 전형적인 동화 서사를 갖고 있던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주인공을 공주인 니네타로 바꾸면서 고민한 것이 있다.

바로 주인공인 니네타의 신분을 그대로 공주로 유지할 것인가 이다.


사실 처음에는 니네타의 신분까지 바꿀 생각이었다. 바로 '농부의 딸'로 말이다.


니네타는 공주이므로 그의 아버지는 왕일 것이다. 하지만 왕과 왕자, 공주와 같이 동화 속의 흔한 주인공들의 유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작업 초반 아이디어 구상 과정에서 아예 니네타의 아버지를 농부로, 니네타를 농부의 딸로 그린 그림도 있다.

농부인 아버지와 그의 딸 니네타 캐릭터 디자인

하지만 고민 끝에 결국 니네타의 신분은 공주로 그대로 가기로 했다. 아쉬운 점이 남는 결정이었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재해석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주인공의 성별 바꾸기 (모험을 떠나 공주를 구하는 왕자 -> 직접 모험을 떠나는 공주)


그런데 여기에 주인공의 신분까지 바꾼다면 고려해야 할 것들이 더 많이 생긴다. 그래서 재해석의 방향성을 주인공의 성별 바꾸기 한 가지에 두고 맞추어 가기로 했다. 

이 작업을 시작한 이유는 전형적인 동화 서사에서 수동적인 구출 대상으로 머물던 공주를 적극적인 모험의 주체로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에 바꿀 것이 한 가지(신분) 더 늘었다면 이야기의 방향성을 잡는 데에 흔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주인공의 신분까지 바꾼다면 성별에 대한 논의에 더해 계급, 경제력에 관한 문제들까지 추가로 다뤄야 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문제들은 모두 중요하지만, 이야기의 방향성을 한 가지로 밀고 나가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 니네타는 원작에서와 그대로 공주가 되었다. 물론 니네타가 농부의 딸이 되었다면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건드리려다간 자칫 이도 저도 아니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만화에서 풀지 못했던 이야기는 언젠가 다음 작업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3. 콘티, 콘티, 콘티...!

만화 작업에서 또 필수적인 과정이 바로 콘티이다. 

사실 반드시 '필수'라고 단언하기는 힘든 것이 작가마다 워낙 작업 방식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최근 만화 작업을 할 때는 콘티를 꼭 그리고 있다. 머릿속으로 구상하던 이야기를 처음 만화 형태로 옮기는 것이 바로 콘티이다. 이때 만화 연출 등도 직접 고려할 수도 있다. 만약 콘티를 그리지 않고 바로 만화를 그린다면, 간단한 만화는 그릴 수 있겠지만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처럼 200쪽에 달하는 장편 만화를 그리기는 힘들 것이다.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작업을 하면서 그린 콘티와 실제 만화를 비교해보면 이렇다.


먼저 만화 첫 번째 페이지의 콘티(왼쪽)와 최종 만화(오른쪽) 버전이다.

나는 콘티 단계에서 컷과 구도는 물론이고 말풍선에 들어갈 내용까지 대부분 정하기 때문에 콘티와 최종 만화가 크게 차이나는 편은 아니다. 콘티만 봐도 만화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이다.

하지만 위 그림은 제일 첫 번째 페이지라서 비슷해 보여도 콘티에서 최종 만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수정을 거쳤다. 또한 이 페이지는 채색까지 다 한 다음에, 책 뒷부분이랑 그림체가 많이 달라져서 새로 다시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다음 페이지!

이 페이지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이다. 제일 마지막 컷의 비극파와 희극파 광대가 우당탕탕 부딪히는 모습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다음 페이지에서는 만화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원작 오페라를 쓴 작곡가 프로코피예프가 등장한다.(혹시 저 캐릭터가 프로코피예프인 줄 한눈에 알아보셨던 분~)

이 페이지는 콘티와 최종 만화가 크게 달라진 점이 있는데, 바로 두 광대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프로코피예프가 연주하는 악기이다. 처음 콘티에서는 프로코피예프가 나팔을 부는 것으로 그렸는데, 최종 만화 버전에서는 ''이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여기서 ''은 이렇게 생긴 악기이다.


한국의 징처럼 생긴 이 악기는, 주로 동아시아에서 쓰이던 것으로 최근에는 서양 오케스트라 연주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공은 소리가 꽤나 커서 오케스트라에서 공을 연주하면 그 음향효과가 상당하다.


그래서 콘티 단계에서 프로코피예프가 연주하던 악기를 나팔에서 공으로 바꾸었다. 제아무리 다투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바로 옆에서 공을 연주한다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슨 일이야?'하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공이라는 악기를 선택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언어유희이다. 

위 만화의 두 번째 컷 오른쪽을 보면 프로코피예프가 문 밖의 사람에게 "잠깐 공 좀 빌려줄 수 있나?"라고 묻고 있다. 이때 '공'은 악기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운동할 때 쓰는 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프로코피예프가 빌린 공은 바로 악기 공으로 동음이의어의 언어유희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콘티와 최종 만화까지 비교해보았다. 

지금 작업 중인 만화도 매 쪽마다 콘티를 그리고 있다. 콘티는 꽤 머리를 많이 쓰는 일이라서 나는 콘티 그릴 때에는 음악도 듣지 못하고 오로지 콘티 그리기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콘티가 끝나면 이제 속히 말하는 '노동'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본격 만화 그리기다....




4. Thanks to...

만화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작업을 시작하면서 참고한 만화가 있다. 

바로 바바라 스톡의 그래픽 노블 『반 고흐』, 『반 고흐와 나』 두 권이다.


이 책을 보신 분은 알겠지만 명암을 넣지 않고 채색한 바바라 스톡의 작업 방식을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만화 작업을 하는데에 영향을 주었다. 나는 만화마다 살짝씩 작업 방식이 다른데,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은 바바라 스톡의 만화처럼 명암을 넣지 않고 채색했고, 특히 원색에 가까운 선명한 색들을 많이 사용하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바바라 스톡의 두 만화에 특히 고마워하는 이유는 바로 『반 고흐와 나』에 나온 어떤 문장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다른 의뢰를 받지 않을 생각이다. 그래서 반 고흐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나는 지난주 두 번이나 일을 거절해야 했다...(중략)... 그렇지만, 이젠 별수 없다. 나의 일정은 촘촘하다. 2년 후 책을 완성하려면 매주 2.25쪽을 마쳐야 한다. 계획을 작성하면서 나는 감기나 휴가로 3주 정도는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 바바라 스톡, 유동익 역, 『반 고흐와 나』, 미메시스(2019)

『반 고흐와 나』는 저자 바바라 스톡이 반 고흐에 대한 만화책 집필을 의뢰받으면서 작업해나가는 과정, 일과 생활을 조율하는 모습, 그리고 출간 이후 삶까지 담고 있다. 『반 고흐와 나』에 나오는 내용에 따르면 그래픽 노블 『반 고흐』 제작은 2009년 12월 의뢰를 받은 시점부터 2012년 12월 출간까지 3년이 걸렸다고 한다. 특히 인용한 위 문장 중 매주 2.25쪽을 작업한다는 바바라 스톡의 말에 나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만화책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은 2019년 11월 구상부터 2021년 11월 출간까지 총 2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다른 단편 만화 작업을 하기도 했고, 개인 사정으로 몇 달간 만화를 그리지 못하기도 했다. 또한 먹고살기 위해 상당기간 생업과 만화 작업을 병행해야 했다.(그건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온전히 만화 그리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적었고, 나 나름의 생활과 만화 작업 사이에서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특히 적정 작업량을 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는데, 어떤 날 컨디션이 좋다고 폭주해서 과로하면 높은 확률로 후유증이 찾아왔다. 그래서 컨디션이 좋든 나쁘든 평탄하게 무리하지 않고 작업할 수 있는 분량을 정해야 했다. 그리고 바바라 스톡의 '매주 2.25쪽'이라는 말은 내게 큰 힌트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은 선화 한쪽, 내일은 채색 한쪽' 이런 식으로 작업해나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작업 기간은 길어졌지만, 중간중간 휴식기가 있었음에도 그림 자체에는 큰 부침이 없었다. 


생활과 만화 작업의 균형은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그릴 때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내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새로운 만화 작업을 한창 하고 있는 지금도, 나는 적절한 루틴을 정해서 되도록 지켜나가고 있다. 




이렇게 해서 총 다섯 편의 만화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제작기가 끝났다!


제작기만 쓰는 데에도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지만, 그래도 만화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충분히 다 쓴 것 같다.


그러면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은 여기에 두고 이제 새로운 만화 작업을 하러 떠난다.


다음에도 즐겁고 재미난 제작기로 찾아올 수 있기를 바라며. 이제 정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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