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다 보면 종종 따뜻하고 복슬복슬한 갈색 공이 팔목을 지그시 눌러온다. 정체는 리지의 뻔뻔한 궁뎅이. 리지는 놀아주기 전까지 계속 궁뎅이를 들이민다. 이 행동은 보통 3단계로 이루어지는 방해 공작의 1단계라 할 수 있다. 리지는 이 단계에선 “아이쿠, 하필 놀고 싶은 펜이 여기 있네에?”라고 말하는 듯한 시치미 뚝 뗀 뒤통수로 내 팔목 위에 뒤돌아 앉아서 펜을 툭, 툭 건드린다.
펜은 곧 바닥에 떨어져 도로록 구른다. 신경이 쓰이지만 이때 펜을 주우면 공작에 말려든다. 난 신경이 안 쓰이는 척, 태연히 작업을 계속하며 방어한다.
그럼 2단계 공작이 시작된다. 리지는 노트북 충전기 선을 툭, 툭 친다. 탓, 탓. 곧 선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이빨로 선을 씹기라도 하면 어쩌지. 불안하지만 외면한다. 리지가 싫증이 나서 장난을 금방 그만둘 수도 있으니까. 난 몰래 다음 타깃이 될 만한 이어폰을 책상에서 슬쩍 치우는 정도로 대응한다. 그럼 리지는 마지막 3단계 공작을 시작한다. 바로 ‘워킹 온 더 키보드’. 키보드 위를 걷는 거다. 곧 ‘ㅍㅍㅍㅠㅣ’ 같은 괴랄한 문자가 화면에 입력된다. “쓰읍” 하고 경고음을 내 보지만, 공작의 짬(?)이 찬 리지는 경고를 ‘듣씹’한다. 그리곤 키보드 옆에 앉아 “놀아주면 어디 덧나? 어? 거 참 섭하네!”라며 냥냥거린다. 전엔 키보드 위에 털썩 주저앉아 발로 엔터키를 누른 적도 있다. 빠르게 올라가는 문서 페이지를 배경으로 버티고 앉아 날 빤히 보는 리지 때문에 웃음이 터져 결국 놀아주었다.
3단계는 무시하기가 정말 어렵다. 정 바쁘고 놀아준 지 얼마 안 된 때라면 난 리지를 들어 올려 내보낸다. 방문도 닫는다. 세상 서러운 울음소리가 방문 틈으로 들려오지만 자동으로 입금되진 않는 캔 값과 루틴화가 필요한 놀이 시간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런데 내가 놀이 시간을 까먹어서 리지가 성을 낸 거라면? 어이코. 일어나 사냥놀이를 준비해야 한다.
사냥놀이는 사실 집사의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사냥 노동’이다. 고양이가 덮치고 싶어서 안달 나게 만드는 사냥감 연기를 훌륭하게 해내야 하니까. 그래야 고양이가 사냥에 아쉬움 없이 사냥을 즐겨 사냥 본능을 해소하고, 집에서 스트레스 없이 지낼 수 있다고 한다.
난 사냥 노동 전, 사냥터를 세팅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리지가 몸을 숨기기 좋은 팰트 재질의 아치형 숨숨터널 2개를 거실 매트 위에 적당한 거리를 두어 배치하고, 앞으로 쭉 빼두었던 거실 리클라이너 소파를 원위치로 돌려놓아 리지가 움직일 공간을 충분히 확보한다. 그다음, 안방 장롱문을 열고 사냥감을 고른다. 사냥에 쓰이는 장난감은 리지가 지겨워하지 않도록 열대여섯 개 정도 갖춰 두고 골고루 쓰는데, 종류는 크게 새(색색의 깃털, 꿩 깃털, 타조 깃털 등), 벌레(나비, 호박벌, 큰 파리 등), 뱀(각종 끈류) 3가지다.
만약 이 중에서 부드러운 갈색 깃털을 고른다면, 연기 컨셉은 ‘방심한 참새’ 정도로 잡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연기의 포인트가 ‘참새’가 아니라 ‘방심한’이라는 것. 진짜 참새처럼 날렵하게 움직이거나 강한 경계심을 보이거면 리지는 못 잡는다. 사냥에 자신감을 잃어 풀이 죽을 수도 있다. 따라서 난 ‘고양이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거실 한복판을 유유히 거니는 참새’ 혹은 ‘쉬려고 앉는 곳이 꼭 눈에 잘 띄는 이불 위인 참새’를 연기하는 게 좋다. 전에 실제 참새처럼 캣타워 꼭대기에 앉았더니, 리지가 날 째려보며 울었다. “와 너무하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계속 성을 내는 리지를 보며 남편은 말했다.
“자기가 생각하는 액션씬이 안 나오나 봐.”
아차. 돌이켜보니 리지는 평소 사냥 시뮬레이션에 열심이었고, 자신의 멋짐이 돋보이는 씬도 찜해둔 듯했다. 바로 숨숨터널이나 벽 같은 엄폐물 뒤에 몸을 숨겼다가 사냥감이 가까워지면 확 덮치는 씬. 이 그림이 안 나올 각이면, 리지는 숨은 채로 버틴다(하여간 똥고집은).
연기력을 리지에 맞춰서 계속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언젠가 리지가 코앞의 사냥감을 놓치곤 더 흥분하길래, 난 ‘방심했다 잡히는 참새’에서 ‘방심했다 잡히기 직전에 도망치지만 금방 잡히고 마는 참새’로 연기를 업그레이드했다. 리지는 열광했다.
단, 어떤 경우에도 ‘밥 먹듯이 방심하는 참새’ 컨셉은 유지해야 한다. 사냥을 15분간 이어가려면 리지가 사냥감을 놓아주었을 때 다시 살아 움직여야 하는 게 기본이다. 죽다 살았는데 또 같은 방식으로 방심하는 참새라니. 캐릭터가 잘 안 받아들여졌을 땐 배우 황정민 님의 연기 조언을 떠올렸다.
“캐릭터에 마음을 열어야 돼요. 반감을 가지기 시작하면 절대 그 캐릭터와는 친구가 될 수 없어요.”
마음을 활짝 연 후, 난 ‘자신이 불사조임을 아는 참새’로 캐릭터를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노동엔 노동요가 빠질 수 없는 법. 난 사냥 노동 시 댄스곡으로 연기의 흥을 돋우곤 한다. 빠른 비트에 낚싯대를 맡기면 15분도 금방 간다(남편도 효과를 보았는지 리지와 놀 차례가 되면 ‘뮤직큐’를 해달라고 한다). 전엔 가수 싸이의 <연예인>에 맞춰 열연을 펼치는데 이런 가사가 들렸다.
그대의 연예인이 되어 항상 즐겁게 해 줄게요.
연기와 노래. 코미디까지 다 해줄게.
이 가사를 집사에 맞게 개사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그대의 사냥감이 되어 항상 즐겁게 해 줄게요. 생쥐와 벌레. 작은새까지 다 해줄게.
그래. 리지가 신나게 놀기만 한다면 이쯤 할 수 있지. 사냥 노동을 펼칠 때만큼은, 나는 리지의 좋은 사냥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