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부엌에 생긴 룰은 ‘식탁의자 확 빼지 않기’. 나와 남편이 밥을 다 먹을 때쯤 리지가 근처 바닥에 털썩 잘 드러눕기 때문이다. 리지는 누운 채, 완두콩 콩알만 한 앞, 뒷발의 발가락 사이사이가 다 보일 정도로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후, 우리가 일어날 때까지 꼬리로 바닥을 툭, 툭 치며 핀잔을 주기 시작한다.
“이제 내 밥 챙겨야지?”
이미 의자 다리로 리지를 몇 번 밀쳐 놀라게 한 전적이 있는 나는 더욱 조심하면서 리지가 없는 쪽으로 의자를 살며시 들고 뒤로 천천히 빼낸다.
이런 행동은 나의 숱한 ‘무(無)조심의 역사’에 비춰보면 놀라운 발전이다. 나는 뭐든지 힘차고 빠르게, 그것도 작은 체구에 비해 큰 동작으로 해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몸 여기저기 난 크고 작은 멍이 그 증거다. 양치질을 역동적으로 하다가 오른쪽 팔꿈치로 화장실 문 모서리를 가격하거나, 침대 옆 무드등을 켜려다 침대 프레임 모서리에 왼쪽 무릎을 찧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살림살이도 부수기 일쑤다. 최근엔 내가 주방 샤워 헤드를 수전에 힘차게 집어넣는 바람에 플라스틱 이음새에 금이 쩍 갔다. 결국 물이 새서 샤워 헤드를 교체했는데, 며칠 뒤엔 그 헤드를 너무 힘차게 빼는 바람에 헤드가 수전에서 뚝 떨어져나와 버렸다. 수전에서 시원하게 뻗어 나온 물줄기는 곧 정수기를 강타했고, 주방은 물 범벅이 되었다. 설거지를 단숨에 물쇼로 격상시킨 나의 재주에 남편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샤워 헤드를 세게 끼우면서, 남편은 유치원생을 가르치듯 말했다.
“여보, 샤워기는 있잖아, 스으윽 넣고, 스으윽 빼는 거야. 팍? 아니야.”
침실에도 예외없이 리지를 위한 룰이 생겼다. 바로 ‘침대에서 홱 돌아눕지 않기’. 리지는 밤에 내 다리 사이에서 자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우리의 밤 수면 패턴에 적응해준 리지는 매일 자정쯤, 우리가 거실 불을 끄면 침실로 따라 들어온다. 우리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침실 캣타워 꼭대기 층에서 쉬다가, 우리가 불을 끄고 잘 준비를 하면 침대와 높이가 가장 비슷한 층까지 한층 한층 내려와 침대로 폴짝! 뛰어든다. 그리곤 내 왼쪽 허벅지에 자기 등을 착 붙여 앉는다. 야무지게 이곳저곳을 그루밍하는 리지는 곧 내 무릎을 베개 삼아 스르륵 잠든다. 리지의 머리는 은근히 무겁지만, 그 눌림을 느끼며 자는 기분은 꽤 좋다. 자는 동안 ‘좋아요 1’ 혹은 ‘믿어요 1’을 계속 받는 것 같아서. 그래서 조금 불편하지만 난 리지의 침대이자 베개로 계속 사랑받기 위해 뒤척이려 노력한다. 돌아누울 때도 3가지 단계를 천천히 거친다. 1단계. 턱살이 접힐 만큼 고개를 살짝 들어 다리 사이에 리지가 있는지 확인한다. 2단계. 리지가 있으면, 바꾸고 싶은 방향 반대쪽의 다리를 가슴팍까지 천천히 올린다. 3단계. 올린 다리를 다른 다리 쪽으로 집어넣는다. 이렇게 하면 다리 한가운데 있던 리지를 이불로 덮거나 밀치지 않고 자세를 바꿀 수 있다.
내 노력 덕에 푹 잤는지, 어느 일요일 아침엔 리지도 내가 오줌이 마려워서 깰 때서야 일어났다. 졸린 눈으로 화장실에 따라 들어온 리지는 고양이용 화장실에 자리를 잡았고, 곧 나의 ‘졸졸졸’에 ‘쪼로록’으로 화음을 쌓아 주었다(!). 수업 사이 쉬는 시간, 화장실에 같이 가준 소싯적 친구들이 머리를 스쳤다. 기꺼이 ‘모닝 쉬 메이트’를 해준 리지는 나와 함께 침대로 돌아가, 점심까지 또 잤다.
이렇게 리지 덕에 생긴 룰은 집안 곳곳에 퍼져 우리의 움직임을 바꿔 놓았다. 우리는 리지의 숨숨터널을 밟지 않기 위해 거실에서 성큼성큼 걸으며, 창밖 구경을 좋아하는 리지를 위해 거실과 작은방 창문을 자주 열고, 자기 전에 전기레인지 코드를 항상 빼놓길 잊지 않는다.
또한 어떤 룰은 아래 리지의 일정에 따라 자연스레 생겼다 사라진다.
07:30 건사료 먹기(자동급식기)
09:30 습식 캔 먹기
11:45 사냥놀이
12:00 건사료 먹기(자동급식기)
14:15 사냥놀이
14:30 간식 먹기
16:45 사냥놀이
17:00 건사료 먹기(자동급식기)
20:30 습식 캔과 영양제 먹기
22:30 양치질 훈련하기
23:15 사냥놀이
23:30 습식 캔과 덴탈 파우더 먹기
하루에 3번 있는 리지의 ‘건사료 먹기(자동급식기)’ 일정은 우리를 ‘귀여움 감상 타임’이라는 암묵적인 룰로 이끈다. ‘또띠따또’하고 자동급식기의 사료 급여 알람 소리가 울리자마자 급식기를 향해 뛰는 리지의 모습은 소스라치게 귀엽기 때문이다. 마치 스타카토(staccato)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처럼 발을 바닥에 통통 튕기며 뛰어가는 리지의 모습은 우리를 매번 웃게 한다. 뒤이어 따라오는 밥그릇 씻어주기, 캔 씻어서 말려주기, 화장실의 ‘감자’와 ‘맛동산’ 치워주기 등의 룰이 낳는 고단함을 잊게 해 준달까.
아무튼 리지 덕에 이렇게 집안 곳곳에 생겨난 룰을 지키면서, 우리의 일상에도 전에 없던 리듬이 생겨나고 있다. 어떤 움직임은 전보다 더 빨라졌고, 어떤 움직임은 전보다 더 느려졌으며, 어떤 움직임엔 시선이 더 오래 머물게 되었으니까. 리지가 자라면 앞으로 또 어떤 리듬의 변화가 생길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