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봐도 조건에 맞는 구직자들에게 뿌려진 단체 문자였지만, 세정은 이 문자를 자신만 받은 양 으쓱해했다. 마침 세정이 쓴 한 탄산음료 광고 컨셉을 광고주가 좋아했단 피드백에 자신감이 올라 있었다. 포지션 제안 메일을 열어보니 조건도 ‘경력 3년 이상’, ‘식품 브랜드 유경험자’였다. 세정의 경력과 딱 맞았다.
그래, 광고 계속 할 거면 블레이드는 한 번 찍어줘야지.
블레이드는 대기업 광고는 물론, 유력한 대선 후보의 선거 캠페인까지 도맡고 있는 국내 1위 광고회사였다. 사내 분위기가 경쟁적이고 야근도 심하지만 광고회사 중 성과급이 가장 높기로 유명했다.
원래 돈 준 만큼 일 시키는 거야. 나 철야 연속으로 하다가 병나서 관뒀어.
블레이드에서 세정네 회사로 이직한 한 팀장님으로부터 블레이드의 악명 높은 업무 강도도 들었지만, 세정은 고연봉이면 뭐든 감당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광고 촬영장에서 연예인 모델이 입던 좋은 옷, 모델이 쓰던 고급 가구, 모델이 끌던 좋은 차를 갖고 싶어서 부러워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돈을 위해서라면 팀 분위기, 사내 복지 등 현 회사의 다른 좋은 조건들은 내려놓을 마음이 있었다. 포지션에 관심이 있다면 내일 오전까지 이력서,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를 보내 달라는 문구를 확인하며, 세정은 메일 창을 닫았다.
진짜 이게 다에요?
세정은 첫 회사에서 지금의 회사로 이직을 준비하던 시절, 이력서에 적어 낸 연봉에 크게 의아해했던 첫 헤드헌터의 말을 떠올렸다.
네. 계약서상 연봉 맞는데요.
세정이 답하자 그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를 나무라듯 말했다.
아니, 그걸 그대로 쓰면 어떡해요. 이직할 때 직전 연봉 곱하기 몇 프로로 새 연봉이 책정되는데, 최대한 붙일 수 있는 건 다 붙여서 올려 써야죠. 복지 포인트든, 수당이든 다 더해서 다시 계산 해보세요.
세정은 회사와 관련된 지난 3년 간의 입출금 내역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외근이나 야근을 할 때 이용했던 택시비, 도서 및 문화생활 지원비, 각종 경조사비, 사내 동아리에 가입하면 준다는 지원 비용까지 다 넣자 연봉이 200만 원 정도 올랐다.
아쉽게 첫 헤드헌터를 통해 지원한 회사에선 서류 탈락을 했지만, 이후 다른 헤드헌터들로부터 이직 제안을 많이 받았다. 헤드헌터별로 연락 스타일은 다양했다. 어떤 헤드헌터는 현 직장을 폄하하며 이직을 부추겼다.
제가 추천드리는 곳이 지금 계시는 곳보단 100배 나은 거 아시죠?
어떤 헤드헌터는 추천 기업과 세정 사이에서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찾아내려 했다.
제가 제안드린 회사의 대표님이 세정 씨 대학교 동문이시거든요!
뉴스레터를 보내듯 꾸준히 제안 메일을 보내는 헤드헌터도 있었다. 세정과 무관한 포지션으로만.
스튜디오 옥상 PD 포지션 제안. 안 맞으시면 주위 분들께도 추천 바랍니다.
블레이드를 자신에게 추천한 것만으로도, 세정은 김 이사가 적임자를 분별할 줄 아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퇴근 후, 세정은 답 메일을 준비했다. 먼저 전에 써둔 자기소개서에서 지원 기업의 이름을 모두 블레이드로 바꾸었고,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파일은 식품 브랜드 관련 경력 위주로 재편집했다. ‘핵심 성과’란엔 오전에 광고주로부터 받은 좋은 피드백도 업데이트했다.
하반기 신규 출시 예정 탄산음료 광고 메인 카피 작성
세정은 모든 파일을 첨부한 후 아래처럼 메일 내용을썼다.
김종훈 이사님,
좋은 포지션 제안 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레이드 카피라이터 지원을 위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전달 드리니 확인 후 연락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세정 드림
메일을 전송한 뒤, 세정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아끼는 잔에 맥주를 따랐는데 조금 급하게 따랐는지, 거품이 잔뜩 올라왔다.
우현이가 이거 봤음 또 성격 급하다고 한 소리 했겠지.
우현은 4달 전에 헤어진 세정의 전 남자친구였다. 만나는 1년 동안 큰 문제는 없었지만, 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헤어졌다. 우현은 결혼 후 아이를 일찍 갖고 싶어했다.
난 좋은 아빠가 되는 게 어렸을 때부터 제일 큰 꿈이었어.
하지만 세정은 커리어를 쌓기 전엔 임신과 출산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육아 관련 복지가 좋아졌다지만 주변의 많은 여자 동료, 선배가 임신 후 회사를 그만두었다. 출산 후 복직을 해도 아이 숙제 챙기랴, 자기 일 챙기랴 남들보다 버거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정은결국 결혼 문제로 우현과 크게 다투다 헤어졌다. 세정은 우현이 보고 싶어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움을 잠깐 달랠 수는 있어도, 곧 무거운 현실이 둘을 짓누를 것이니까. 세정은 거품이 사그라든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다음날 오후 2시쯤, 김 이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세정은 비상계단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이세정 씨 맞죠? 김종훈 이사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메일 잘 봤어요. 다 좋은데 딱 하나만 수정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세정이 급히 나오느라 피드백을 꼼꼼히 적을 만한 필기도구를 안 가지고 나온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김 이사가 짧게 의아한 요청을 했다.
사진을 좀 바꾸면 좋을 것 같아요.
네?
세정은 놀랐다. 블레이드는 지원자 외모까지 평가 대상인가 싶어 의아해하고 있는데 김 이사가 말했다.
이렇게 올백 머리에 정장입은 전형적인 증명사진은 요즘 광고회사 지원엔 좀… 명색이 국내 탑 광고회사 지원서인데 스타일리시해 보이면 좋잖아요.
세정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4년 전 취업 준비를 할 때 찍었던, 파란 배경 앞에 검은 정장을 입고 찍은 증명사진을 생각 없이 넣은 무심함을 들킨 것 같았다.
꼭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아니어도 좋아요. 카페 같은 데서 찍은 자연스러운 사진도 좋고.
네. 한 번 찾아볼게요.
고르기 어려우면 잘 나온 거 몇 장 보내줘도 좋아요. 블레이드 이직 많이 성사시켜봐서 그쪽이 선호하는 스타일을 제가 잘 알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