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이사의 디테일한 사진 요구가 이상했지만 세정은 합격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는 요소는 뭐든 꼼꼼히 챙기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폰에서 쓸 만한 사진을 찾던 세정은 우현이 요거트 아이스크림 맛집, 에이스크림에서 찍어준 사진들을 발견했다. A자 모양의 과자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담은 에이스크림으로 SNS에서 유명세를 탄 곳이었다. 매장 인테리어 사진을 슥슥 넘기던 세정의 검지가 한 사진 위에서 멈췄다. 사진 속 세정은 정면을 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이거 우현이가 찍어준 건데.
세정은 우현과 얽힌 것은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겨두고 싶어 다른 사진을 찾았다. 눈은 사진을 살피고 있었지만, 마음은 우현을 향해 있었다.
우현인 뭐하고 있을까. 애 일찍 낳고 싶은 여자는 만났으려나?
그런데 다른 사진을 1천장 넘게 훑어봐도 우현이 찍어준 사진만큼 미소가 환하고, 세정이 밝아 보이는 사진은 없었다. 세정은 고민 끝에 김 이사에게 그 사진을 보냈다.
1분도 채 안 되어 김 이사로부터 답이 왔다.
굿.
갑자기 짧아진 김 이사의 답에 세정은 풉, 웃었다.
재밌는 분이시네.
세정이 막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김 이사였다.
세정 씨, 죄송한데 수정 딱 하나만 더요. 자기소개서 성격의 장점에서요, 대학교 광고동아리 회장 경험을 언급하시면서 주도성을 성격의 장점으로 적으셨잖아요?
네. 그 내용이 일찍 광고에 관심 가졌다는 거랑 리더십이 있다는 걸 같이 어필하기 좋아서요.
장점을 혹시 배려심 쪽으로 다시 쓰실 순 없을까요
네? 그건 너무 무난한 장점 같은데요?
리더십도 솔직히 흔해요.
세정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나름 글을 잘 쓴다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온 세정이었다. 이력서 내용을 꼬투리 잡힌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정이 더 말이 없자 김 이사가 세정의 기분을 눈치챈 듯 달래듯이 말했다.
아, 내용이 안 좋다는 게 아니라 채용 포지션에 더 적합하게 약간만 수정을 해보십사, 제안드리는 거에요. 뽑는 사람이 팀장이 아니라 팀원이잖아요. 블레이드는 워낙 규모가 커서 팀당 팀원 수가 다른 회사의 거의 두 배거든요. 실력은 갖고 계신 경력으로 검증이 충분히 되시니까, 성격은 기존 팀원들과도 잘 어울리고, 일도 협조적으로 하는 면을 어필하는 게 합격에 더 유리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설명을 들으니 세정도 조금은 납득이 되었다. 어찌됐든 김 이사도 자신의 이직을 잘 성사시켜야 수수료를 받으니, 이직을 방해하는 요구를 해올 리도 없었다.
네, 장점은 곧 수정해서 전달 드릴께요.
세정은 자리로 돌아 와 폰 메모장 앱을 켰다. 동아리 활동 중 다른 동아리원들을 배려한 내용을 떠올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탄산음료 브랜드 담당 영업 팀 대리로부터 전화가 왔다.
세정 대리님, 큰일 났어요. 광고주가 변덕을 부려서 갑자기 컨셉 새로 모레까지 달래요.
날벼락 같은 소식에 영업 팀과 세정이 속한 제작 팀 간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다. 영업 팀 팀장이 광고주의 의견을 전했다.
광고주 상무님이 ‘혀 때리는 맛’이 본인이 요구한 B급 카피고 재밌어서 처음엔 좋았는데, 갑자기 ‘때린다’는 표현이 좀 걸린다고 하셨대요. 최근에 학교폭력 관련 기사가 좀 오르내렸잖아요. 괜히 안 좋게 엮일까 봐 불안하시다고. 다른 말로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세정의 팀장이 반박했다.
그렇게 엮는 건 좀 오버 아닌가요? 아시겠지만 세정이가 쓴 ‘때린다’는 카피는 진짜 뭔가를 친다는 의미보다는 ‘골 때린다’라는 관용어에서 출발한 거잖아요. 괜찮을 거라고 광고주를 설득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세정도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진짜 친다는 의미도 사실 요즘 인터넷에서 많이 쓰여요. ‘뼈 때린다’ 같은거요. 핵심을 제대로 찌른다는 뜻인데, 이 말을 폭력적이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영업 팀 팀장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안 그래도 저희도 딱 ‘뼈 때린다’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대로 가자고 이미 한 번 설득해봤는데 안먹히더라구요. 광고주 팀장은 어쨌든 상무님이 불안하다 한 아이디어는 무조건 수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에요. 일정 촉박한 걸 아니까 저희쪽에서도 대체어를 같이 생각해볼께요. 제작 팀에서도 모레 오전까지 대체 컨셉 전달 부탁드립니다.
세정은 좋다고 여겼던 아이디어가 반려되자 기운이 쭉 빠졌다. 안 그래도 유난히 수정 요청이 많은 광고주였는데 또 수정 요청이 오자 화가 났다.
광고주한테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진짜 이직하고 만다.
세정은 더 절실한 마음으로 이력서 내용을 수정했다. 김 이사는 세정이 수정한 내용을 단번에 오케이했다.
굿.
며칠 뒤, 세정이 ‘혀를 강타하다’ 류의 새 카피를 쓰느라 낑낑대고 있을 때 김 이사의 전화가 왔다.
세정 씨, 축하드립니다. 서류는 통과 됐어요.
오! 다행이네요.
서류야 당연히 되실 줄 알았어요. 다음 스텝이 팀장 면접인데, 면접 팁을 뵙고 좀 알려 드리려 해요. 혹시 다음 주 월요일 점심시간에 30분 정도 시간 되세요?
네.
세정은 김 이사와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첫 관문을 넘은 것 뿐이지만, 이미 합격한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주말에 세정은 친구 하연이를 만났다. 하연이가 데려가 준 카페는 목욕탕을 개조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옛 목욕탕의 타일이 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어 정감이 갔다. 둘은 개조된 온탕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식혜, 맥반석 계란 2개를 주문했다. 하연이는 맥반석 계란 같은, 실제 목욕탕에서 파는 간식을 본딴 디저트 메뉴와 목욕탕 비누 케이스처럼 생긴 쿠키 그릇이 위트있다며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같은 마케팅 업계에서 일하는 하연은 최근 이직을 했는데, 그 뒤 일에 대한 의욕을 되찾은 것 같았다. 세정은 그런 하연을 부러워하다 헤드헌터에 관해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아, 하연아, 너도 이직할 때 헤드헌터가 이것저것 많이 수정하라했어?
아니? 프로젝트 목록 수정 정도?
어떻게 수정하라 했는데?
헸던 프로젝트들 다 때려 넣었었거든. 그랬더니 면접에서 질문 들어왔을 때 장점 어필이 잘 될만한 프로젝트 대여섯개만 추려서 큰 글씨로 위에 쓰고, 나머지는 작은 글씨로 적으라 하더라고.
좋네. 고친 게 면접에서도 실제로 좋았어?
응. 면접 때 진짜 위에 추린 거만 물어보더라고.
흠…
왜? 넌 헤드헌터가 뭐 수정하라 했는데?
사진이랑 자기소개서 성격의 장점. 사진은 자연스럽고 스타일리시해 보이는 거로 바꾸고, 장점은 리더십을 배려심으로 바꿔서 쓰랬어. 팀원 포지션에 어필하는 덴 배려심이 더 유리하다던데?
응? 리더십도 주도적으로 일 열심히 하는 이미지 주니까 좋은 거 아냐?
그러게. 좀 이상하더라. 고친 게 진짜 더 나은지 한번 볼래?
세정이 고치기 전후의 장점 부분을 보여주자 하연이는 더 의아해했다.
난 둘다 좋은데? 근데 특이하다. 보통 경력직 자기소개서는 잘 안 본다고 들었거든. 그냥 인사팀에서 형식적으로 요구하는 문서로 알고 있었는데.
그러게. 혹시 여기 팀장이 성격 꼬인 팀원 뽑아서 데인 적 있었나?
뭐, 그럴수도?
어쨌든 수정한 것들 덕분인지 아닌지는 모르는데 서류 통과는 됐어.
오! 축하해!
얼른 너처럼 이직 잘하고 싶다.
야야, 나 다음 주부터 새 프로젝트 시작하는데 그럼 여기도 지옥이라고 또 이력서 새로 쓸지도 몰라.
에이, 괜찮겠지. 아니어도 너 남자친구가 또 정신줄 잘 잡아줄 거고.
아, 나 걔랑 헤어졌어.
뭐?
5달 전쯤, 하연이한테서 소개팅한 사람과 잘 만나고 있단 소식을 들었던 세정은 놀랐다.
걔가 친구를 너무 자주 만나더라고. 거의 일주일에 3일은 친구들이랑 모이는데, 만났다 하면 필름 끊길 때까지 마셔. 헤어지기 전 주엔 같이 토요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강원도 놀러가기로 해 놓고, 금요일 밤에 꽐라돼서 내 전화 다 씹고 잤어. 일어났단 연락 받은 게 점심 쯤이었나?
그럼 완전 서운하지.
응. 놀 때 재밌는 건 좋은데, 앞으로도 얘가 친구 때문에 속 썩일 거 생각하니까 결혼 상대론 아니겠더라고. 먼저 헤어지자 했어.
잘했네.
세정은 하연이가 결혼을 빨리 하고싶어한단 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연이 꿈꾸는 미래는 우현이 꿈꾸던 미래와 많이 닮아 있었다. 가정에 충실한 부부, 둘을 꼭 닮은 귀여운 아이들.
이번엔 하연이 물었다.
넌 만나는 사람 있어?
아니. 우현이랑 헤어진 다음엔 소개팅 들어온 것도 없었어.
하연은 한숨을 쉬었다.
나이는 들고, 점점 새로운 사람 만날 기회는 줄고. 걱정이다.
그니까. 주위에선 조건 따지지 말고 많이 만나라는데, 아니 조건 따질 사람이나 한 명 소개시켜주고 그런 소리 하던가.
큭큭. 맞네. 야 우리 꼭 좋은 사람 만나자.
그래. 야 짠이나 하자.
둘은 식혜잔을 맥주잔처럼 쨍 부딪쳤다.
월요일 점심. 세정이 김 이사를 만나기로 한 곳은 회사에서 멀찍이 떨어진 한 카페였다. 카페 문을 열고 두리번거리는데 김 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정 씨?
세정이 돌아보니 창가 쪽에 네이비 색 수트를 입은 깔끔한 용모의, 40대 중반 쯤 되어 보이는 남성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둘은 음료를 주문하며 잠깐 담소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 세정이 필기구를 꺼내며 자신이 해 온 노력을 어필할 겸, 말했다.
인터넷에서 팀장 면접 질문을 나름 찾아봤는데요, 팀장 스타일마다 질문이 완전 제각각이더라구요.
그렇죠. 일머리를 중시하는 분들도 있고, 인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맞아요. 전 그럼 어떤 질문 위주로 준비를 해가면 좋을까요?
김 이사가 대답 대신 갑자기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근데 면접 팁 이야기 전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요?
들으시면 처음엔 굉장히 화가 나거나 당황스러우실 수 있는데요, 딱 이성적인 이득만 생각하시면서 끝까지 들어봐 주세요.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