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이사는 양복 안쪽 주머니에서 각각 금색과 은색 명함지갑 2개를 꺼냈다. 각 명함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씩 꺼내 세정에게 건넸는데, 금색 명합지갑에선 헤드헌팅사, ‘퍼펙트 매칭’ 이사직 명함이 나왔고, 은색 명함지갑에선 처음 보는 ‘퍼펙트 커플 매칭’이라는 결혼정보회사 이사직 명함이 나왔다.
제가 직업이 두 개인데요, 같은 계열사인 헤드헌팅사와 결혼정보회사 이사를 겸직하고 있어요.
네에?
갑작스런 결혼정보회사 이야기에 놀란 세정에게 김 이사는 말했다.
블레이드 이직 건은 걱정 마시고 그대로 진행하시면 되고요, 오늘 뵙자고 한 건 혹시 미래 배우자 만남도 추가 진행 의사가 있으신지 얼굴 뵙고 여쭤보려 그런 거예요. 이런 이야길 전화로 말씀드리면 사기친다고 오해하실 것 같아서요.
세정은 당황스러운 동시에 불쾌했다. 자신에게 절실한 시점에 새카만 속내를 드러낸 김 이사가 헤드헌터가 맞는지도 의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이직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가 있었다.
며칠 전에 블레이드 인사팀한테서 공식 서류 합격 메일 왔잖아.
세정은 일단 믿고 이직이 마무리될 때까진 김 이사랑 원만하게 지내야겠다고 판단하며 결혼정보회사 건에 대해선 정중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너무 당황스럽네요, 이사님. 그런데 죄송하지만 전 이직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김 이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보통 처음엔 세정 씨처럼 거절들을 많이 하세요. 저도 더 푸쉬는 안 하고. 그런데 세정 씨는 정말 괜찮은 분 같아서, 제가 정말 좋은 분이랑 연결해드리고 싶어서 다시 권해드려요. 이미 작성하신 정보로 연결해드리는 거, 따로 더 뭐 작성 안하셔도 되니 편하고요. 세정 씨 케이스랑은 반대로, 어제 저 통해서 배우자 만남 요청하셨다가 이직 컨설팅까지 추가 신청하신 30대 여성 분도 계셨어요.
열변을 토하던 김 이사는 목이 마른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잘 생각해보세요. 구직이랑 구혼은 조건을 똑똑히 따져봐야 하는 인생 중대사라는 점에서, 정말 비슷하거든요.
세정은 김 이사의 말이 아주 일리 없진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 하나만으로도 불 같이 연애할 수 있고, 열정 하나만으로도 철야 근무를 버틸 수 있었던 20대와는 달리, 30대의 연애와 일은 현실적인 조건을 따져가며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건을 맞추기 어려웠던 우현과 헤어졌고, 더 좋은 조건에서 일하기 위해 블레이드로의 이직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김 이사가 이어서 말했다.
제가 구직, 구혼 투잡을 해보니까요, 구직자들 자소서만 읽어도 그 사람과 결혼 상대로 잘 어울릴 것 같은 다른 구직자가 훤히 보여요. 예를 들어서 성과우선주의인 기업에 지원하는 사람은 ‘함께 성장할 수 있고, 목표가 높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을 배우자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랑 잘 맞아요. 말이 되죠?
세정은 끄덕이면서도 불쾌했던 부분은 짚고 넘어가고 싶어 물었다.
그렇긴 하네요. 근데 이사님, 제가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시면서 어떻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거예요?
김 이사가 민망해하며 말했다.
일단 제안드려 보는 거죠. 세정 씨처럼 제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분들께는 실례를 무릅쓰고라도 혜택을 알려드리고 싶어져요.
세정은 김 이사의 호의 속엔 구직과 구혼을 동시에 진행해, 수임료를 2배로 벌려는 속셈이 깔려 있다고 생각했다. 세정은 불쾌했던 기억을 곱씹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전에 내 사진이랑 성격의 장점 수정하라 한 것도, 자기가 구직에도 써먹고 구혼에도 써먹기 좋게 내 정보 바꾼 거 고만?
세정은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원만한 이직 진행을 위해 다시 정중히 거절의사를 밝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이직에 올인하고 싶어요. 사실 직장 다니면서 이직을 준비하려니 시간도 별로 없고요. 만남은 이직이 끝나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김 이사는 세정을 달래듯이 말했다.
당연히 이직은 올인해야죠. 그런데 그거 때문에 좋은 인연을 놓치는 건 아깝잖아요. 아, 이 분 어떤지 한 번만 봐 보실래요?
김 이사는 핸드폰 사진첩 속 한 남자의 사진을 세정의 눈 앞에 들이밀었다. 키가 훤칠하고 인상 좋은 한 남자가 바다 앞에서 씩 웃고 있었다.
세정 씨보다 2살 위. 솔로고, DQ건설 다니는 분이에요. 더 큰 건설사로 이직 준비중인 걸 제가 돕고 있구요. 제가 최근에 두 분 자기소개서를 보니까 두 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첫 번째 만남만 하고 끝나시면 중개료 안 받으니까 비용 부담 갖지 마시고요.
김 이사는 그 남자의 메신저 프로필 속 다른 사진들도 세정에게 보여주었다. 카페에 앉아 있는 자연스런 사진은 누가 봐도 전 연인이 찍어준 것 같았다. 세정은 속으로 웃었다.
그래도 이 남자는 이력서 사진 이거로 바꾸진 않았겠네. 건설회사는 보수적이니까. 근데 진짜 잘 생겼다.
세정은 남자의 훈훈한 외모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지만, 이직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싶지 않았다. 승낙할 때까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김 이사에게 세정은 말했다.
만남은 생각해볼께요. 이사님, 저 이제 가 봐야해서요.
김 이사는 일말의 승낙 가능성을 잡은 듯 밝아진 표정으로 답했다.
네네, 가급적 내일까진 답변 주세요. 세정 씨 만남 의사 없으시면 다른 분께 소개하려구요. 면접 팁은 메일로 보내드릴께요.
다음 날,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 세정이 퇴근할 쯤, 후배 다정이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세정 카피님, 혹시 이직 준비해요?
엇, 어떻게 알았어?
어제 레퍼 체크 전화 왔었거든요. 저 이야기 진짜 잘해드렸는데! 이직하시면 저도 나중에 꼭 데려가주세요!
고마워! 가면 진짜 애써볼께. 아, 나 이직 준비하는 건 비밀로 해주라.
당연하죠. 이직 화이팅하세요!
세정은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김 이사가 준 면접 질문 리스트의 답을 적어 내려갈 만큼 이직 준비에 몰두했다. 면접이 어느새 열흘 뒤였다. 세정은 김밥과 떡볶이로 저녁을 대충 때우면서 머릿속으로 면접 장면을 시뮬레이션했다. 이력서를 보며 예상 질문 리스트를 적다가, 우현이 찍어 준 것으로 바뀐 이력서 사진을 보자 갑자기 우현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은 아직 그대로이려나?
세정은 친구 목록에서 숨김 해 두었던 우현의 사진을 클릭했다.
그런데 우현의 프로필 사진은 웨딩 스튜디오 촬영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약 3주 전에 업데이트 된 그 사진 속에서 우현은 턱시도를 입은 채, 환한 미소로 자신의 신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부는 세정보다 5살은 더 어려 보였고, 단아한 웨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우현의 프로필 소개 문구는 ‘10월 15일 토요일 12시 스플레아 호텔 3층’이라고 바뀌어 있었다.
우현에게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정은 충격이 컸다.
뭐야, 나랑 헤어지고 금방 사귀었네?
사귀는 동안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자신을 아껴주고 표현을 많이 했던 우현이었던 터라, 세정은 우현의 마음이 이렇게 빨리 다른 사람에게 정착한 게 놀라웠고, 배신감도 느꼈다.
나보다 훨씬 힘들어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세정은 자신이 안일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우현에 대한 약간의 그리움, 곧 좋은 인연이 나타날 거란 기대감에 감상적으로 젖어 있는 동안 우현은 냉정하게 현실을 인지하고, 조건이 딱 맞는 사람을 만나 결혼에 골인할 게 아닐까.
그 건설회사 사람, 일단 만나 볼까.
세정은 문득 김 이사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추천한 남자가 생각났다.
어차피 첫 만남은 무료잖아.
더군다나 그 남자의 외모는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은 외모였다.
다음 날, 세정은 김 이사에게 연락했다.
이사님, 만남 해 볼게요. 그 전에 보여주신 분이요.
1분도 안 지나서 김 이사의 답장이 왔다.
굿. 잘생각하셨어요. 세정 씨 연락처 넘길께요.
그 주 금요일에 스시집에서 만난 남자는, 건설회사에 다니는 남자는 어딘가 마초같을 거란 편견과 달리 다정한 구석이 많았다. 이름은 박태민이고, 실물은 사진보다 더 훈훈했다.
태민은 연어초밥 하나를 세정의 접시 위로 하나 올려 주며 이야기했다.
사실 저도 김 이사님 이야기 들었을 때, 사기인 줄 일았어요. 그런데 세정 씨 사진보니까 너무 예쁘셔서 한 번 뵙고 싶었어요.
예의상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세정은 기분이 좋았다. 세정도 속내를 이야기했다.
저랑 똑같으시네요. 너무 잘생기시고 인상도 좋으셔서 궁금했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태민 씨는 왜 이직하고 싶으세요?
분위기가 너무 군대식이라서요. 회식도 참석 필순데 거의 주 3일 회식이에요.
너무 자주 하네요.
꼰대가 많아서 그렇죠, 뭐. 세정 씨는 왜 이직 준비하세요?
연봉도 좀 올리고, 더 큰 브랜드 일도 하고 싶어서요.
태민이 맞장구쳤다.
연봉 중요하죠. 결국 회사는 돈 벌려고 다니는 건데.
맞아요.
그리고 저도 더 큰 건 하고 싶어서 이직하는 것도 있어요. 개인적으로 건설사 중 탑을 한 번 찍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요.
태민은 세정과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이야기가 너무 잘 통해서 둘은 2차, 3차까지 술을 마셨고 첫 만남 날 새벽 1시쯤 헤어졌다.
간간히 오는 태민의 연락은 일에 큰 활력소가 되었다. 음료수 카피가 안 써져서 힘들 때도 세정은 태민의 응원에 힘이 났다. 이직이 주목표였는데, 배우자 만남이 주목표로, 목표도 주객전도가 된 것 같았다. 세정에겐 태민을 주말에 만나기로 한 일정이, 면접 일정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음료수 카피 수정 건으로 정신이 없었는데, 마침 블레이드 인사팀으로부터 본부 조직 개편 이슈로 면접 일정이 1주일 정도 밀린다는 연락이 와서, 준비에 여유가 더 생긴 것도 좋았다.
단, 회식이 잦은 태민과 연락이 잘 되지 않는 건 아쉬웠다. 월요일 7시에 회식을 간다던 태민은 팀 회식이 늦어졌다며 자정이 다 되어서야 전화를 해 왔다.
이제 들어가는데 죽겠네요. 음료수 카피는 잘 써져요?
아니요. 계속 써 봐야죠 뭐.
힘내요! 금방 좋은 거 나올 거예요.
고마워요. 태민 씨도 푹 쉬세요!
다음날, 태민은 과음으로 연차라도 냈는지 오전 내내 연락이 없었다. 음료수 카피는 다행히, 세정이 전날 쓴 ‘혀를 강타하는 맛’으로 최종 컨펌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세정은 이력서에 마지막으로 업데이트한 실적에 대해서 더 할 말이 생겼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세정은 점심엔 후배 다정이와 회사 근처 맛집에서 일본 라멘을 먹기로 했다. 그간의 이직 준비 소식을 들려주면서 메뉴를 기다리는데, 세정네 테이블 옆에 걸려있던 TV에서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속보입니다. 헤드헌팅사를 사칭한 결혼정보회사를 운영하여 300여 명이 넘는 여성들의 정보를 불법으로 거래해 온 김 모씨가 경찰에 구속되었습니다. 미혼 여성들에게 접근해, 정보를 빼 내 불법 중매업을 운영한 혐의입니다. 그가 여성들에게 연결시켜 준 남성들 중엔 ‘얼굴마담’도 있었습니다. 중매 수수료를 뜯어내기 위해 생계가 절실한 배우 지망생 남성에게 웃돈을 얹어 첫 만남에 여성들을 유혹하라고 한 뒤, 두 번째 만남부터 중매 수수료를 여성들로부터 받아 반씩 나눠 가지는 방식으로 사기를 쳐 온 것입니다.
뜨악한 세정이 놀라 화면을 집중해서 보는데, 언뜻 세정이 제출했던 증명사진이 모자이크 처리 된 채 보였다. 그의 사진이 위로 기자는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구직자들의 절실함을 악용한 악질의 죄질에 엄벌이 필요합니다. 사칭의 피해 규모는 아직…
다정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꼭 저런 사기꾼한테 걸리는 헛똑똑이들이 있다니까요. 그쵸, 선배?
세정은 당황한 얼굴을 숨긴 채, 끄덕이며 단무지를 씹어 삼켰다. 태민도 얼굴마담이었을까. 세정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