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볼에 관한 흑빛 상상
이안에게 스노우볼은 손 안의 환상에 불과했다. 12월 1일 밤, 그들을 만나기 전까진.
따깍.
이안은 그날 밤도 어김없이 스노우볼을 켰다. 자기 전에 불안을 떨쳐내는 의식이었다. 볼에 주홍 불빛이 들어오며 어둠을 두 뼘 정도 밀어냈다. 볼 바닥에서 눈가루가 일제히 떠오르며 생긴 느린 눈 회오리가 이층 벽돌집, 트리 네 그루, 입이 긴 눈사람을 휘감았다. 이안은 쌀알만 한 눈가루 하나를 골라 동선을 집요하게 좇았다. 불안이 끼어들 틈을 못 찾아 사그라들길 바라면서. 침실로 들어오던 주호가 이안을 보며 의아해했다.
또 그거 봐?
으응.
이안은 볼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충 답했다. 볼은 5초마다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 주홍, 분홍, 파랑, 보라, 초록, 다시 주홍······팅, 티링거리는 오르골 소리는 몸을 일으키려던 불안을 잠재웠다. 이안이 계속 자신을 본체만체 하자 주호가 홱 돌아누우며 말했다.
그렇게 좋으면 들어가 살든가.
풉.
이안은 돌아 누워 주호를 껴안으며 말했다.
싫어.
그리곤 속삭였다.
들락날락하면 모를까.
이안은 스노우볼 안에서 쉬다 오는 상상을 종종 해 왔다. 이안이 보고 있던 스노우볼, ‘눈꽃에 휩싸인 마을’은 이안이 다니는 스노우볼 제조사 ‘도셜 스노우볼’의 시그니처 상품인데, 평화로운 마을 풍경을 잘 구현해 매년 잘 팔리고 있었다. 이안은 볼 속 벽돌집의 다락방 내부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세모 모양의 벽에 네모난 작은 창이 나 있고, 창을 기준으로 왼쪽 벽엔 나무로 만든 침대가, 오른쪽 벽엔 작은 책상과 책장이 있을 것 같았다. 그 사이엔 푹신한 건초가 수북이 쌓여 있고. 이안은 건초에 누워 눈 내리는 창 밖 풍경을 감상하고 싶었다.
하얀 풍경을 질리도록 보는 거야. 그러다 지루해지면 1층으로 내려가야지. 주호가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서 졸고 있겠지? 그럼 나가자고 꼬셔야지. 눈사람이나 만들자고······
이안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이안은 눈을 떴을 때,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베이지색 작업복 차림이었고, 오른손엔 삼십 센티가 넘는 큰 가위를 들고 있었다. 이안이 놀라 몸을 옆으로 옮기며 물었다.
누, 누구세요?
전 요페라고 해요.
이안의 겁먹은 눈이 가위를 향해있단 걸 눈치채자, 요페는 가위를 뒤로 숨겼다.
걱정마세요. 해치려는 거 아니에요.
이안은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요페는 씩 웃었다.
내려와 보면 알아요.
나무계단 아래로 먼저 걸어간 요페는 발목부터 다리, 허리, 머리 순으로 서서히 잠기듯 사라졌다. 이안은 얼떨떨했다. 둘러보니 주위엔 나무 침대, 책상, 책장이 있었고, 기대 있던 폭신한 쿠션 같은 것은 건초더미였다. 창밖으론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내려다보니 집 앞엔 눈사람이, 집 양 옆엔 큰 트리 두 그루가 있었다.
설마.
이안은 나무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벽난로와 흔들의자가 있는 1층을 지나 문밖으로 나갔다. 투명한 유리 밖으로 잠든 자신과 주호가 보였다.
여기 볼 안이잖아?! 어떻게 들어온 거지? 밖에 저 사람도 나야?
놀란 얼굴로 다시 집에 들어오자 요페가 커피와 비스킷이 담긴 쟁반을 내오고 있었다.
여기 스노우볼 안 맞죠?
네. 정식 이름은 ‘인로디아’에요.
이안은 요페가 커피잔을 거실 나무 테이블에 내려놓기도 전에 질문을 쏟아냈다.
저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저 밖에 있는 건 저예요? 저 다시 나갈 수는 있어요?
요페는 흥분한 이안에게 말없이 커피잔을 내밀었다. 그리곤 맞은편 올리브색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면서, 흔들의자에 기대앉으며 말했다.
매달 1일, 전 세계의 모든 도셜 스노우볼은 도셜 직원 한 명을 랜덤으로 뽑아서 인로디아로 초대해요. 볼을 제작하느라 고생한 데 대한 깜짝 선물로요. 이안 씨는 12월 당첨자인 거죠. —저흰 이안 씨 같은 사람을 ‘볼 바깥사람’이라고 부르는 게 더 익숙하답니다. 참고로 볼 안사람인 저희는 빌로벨이라 불려요—. 이안 씨는 이제 1달간 아무 때나, 원하는 시간만큼 볼 안에 머물 수 있어요. 아, 몸은 밖에 잠든 채로 있고, 의식만 초대되는 거예요.
무슨 영화에나 나올 일이······ 안 믿겨요.
요페는 웃으며 말했다.
다들 처음엔 못 믿어요. 근데 얼른 믿는 게 좋을걸요? 여기 올 수 있는 날은 딱 1달뿐이니까. 1달이 지나면 다신 여기 못 들어와요. 인로디아에서 있었던 기억도 다 사라지고요. 저희들에 대한 기억도······
요페의 얼굴에 순간 쓸쓸함이 스쳤다. 빌로벨에겐 바깥사람과 함께했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건가. 요페가 애써 태연한 척하는 것 같아 이안은 더 캐묻지 않았다. 이안은 화제를 전환해 물었다.
근데 왜 저 그동안 빌로벨 분들을 한 명도 못 봤죠? 저 볼 매일 보는데.
볼 밖에선 저희가 안 보이게 볼에 특수 장치가 되어있거든요. 아마 저희가 정비한 풍경만 보셨을 거예요.
정비요?
스노우볼 안의 집, 트리 같은 소품은 모두 플라스틱 재질이라 이안은 정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안의 어리둥절한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요페는 웃었다.
정비하는 거 구경해볼래요?
네.
커피잔을 내려놓고 일어난 요페는 오른손으론 가위를 들고, 왼쪽 어깨엔 낡은 접이식 사다리를 걸친 채 밖으로 나갔다. 이안은 남은 비스킷 반 조각을 얼른 입에 털어 넣고 요페를 따라 나갔다. 요페는 집 왼편의 트리—정확히는 플라스틱 재질의 모형 트리— 앞에 섰다. 사다리 밑단을 바닥에 고정한 후, 한 단씩 능숙하게 위로 뽑아 올려 사다리 끝을 트리 꼭대기에 걸쳤다. 요페는 트리를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이번 주는 가지가 덜 자랐네.
플라스틱이 자란다고요?
이안은 기가 찼다. 요페는 태연하게 위를 가리켰다.
저어기. 가지들 들쭉날쭉 삐져나와 있잖아요.
이안이 위를 보니, 정말 튀어나온 가지들이 보였다.
······ 얘넨 뭐 먹고 자라요?
빛이요. 햇빛, 형광등 불빛, 볼 조명 다요.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해줘야 모양이 예쁘게 유지돼요.
요페는 사다리 맨 밑단을 발로 툭툭 쳤다. 사다리가 안전하게 고정된 것을 확인한 뒤, 한 발 한 발 위로 올라갔다. 요페는 꼭대기부터 내려오며 가지를 다듬었다.
저도 가지치기해봐도 돼요?
그럼요.
이안이 트리 중간쯤에 난 두꺼운 가지를 잘랐는데, 튕겨 나온 나뭇조각에 뺨을 맞을 뻔했다.
으앗!
괜찮아요?
네. 아슬아슬하게 피했어요.
다행이네요. 맞으면 상처가 나거든요.
요페가 몸 여기저기 난 상처를 보여주었다. 목엔 가지에 긁힌 듯한 자잘한 상처가, 손등엔 원예용 가위 날에 베인 길쭉한 상처가 나 있었다. 스노우볼은 이안에게나 환상이지, 빌로벨에겐 치열한 노동이 요구되는 일상이었다. 이안은 요페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집 왼편 트리 가지치기를 끝낸 요페는 집 오른편 트리로 사다리를 옮겼다. 나무의 키가 더 커서 요페가 사다리 단을 대여섯 개 더 뽑아 올리자 끼기기긱, 하고 귀를 긁는 큰 소음이 났다.
요페! 사다리 좀 새로 사라니까?
지붕 위쪽에서 한 남자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부에서 그냥 쓰래. 예산 없다고.
뭐?!!
남자가 지붕 밖으로 씩씩거리는 얼굴을 쑥 내밀었다. 이안을 발견하자 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아, 이번 달 바깥사람이신가?
남자는 자신의 이름은 차터이며, 요페의 남자 친구이자, 집 외관 관리를 담당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안은 차터의 작업도 구경했다. 그는 지붕 위 굴뚝에 로프를 감고 천천히 내려와서 벽을 타고 집을 한 바퀴 돌았다. 벗겨진 외벽이 보이면 고동색 페인트 통에 붓을 찍어 그 부분을 덧칠했다. 차터는 작업을 마친 후, 호기심 가득한 표정의 이안에게 말했다.
눈가루가 날려서 스칠 때마다 벽 페인트가 조금씩 벗겨지거든요. 허옇게 드러난 부분은 3일에 한 번 정돈 덧칠을 해줘야 해요.
이안은 매일 밤 볼을 켜 차터의 일을 늘린 것 같아 미안했다.
······죄송해요. 앞으론 볼 좀 덜 켤게요.
차터는 손사래를 쳤다.
워워. 정비할 게 있어야 저도 이 직업을 유지할 수 있어요. 볼 자주 켜 줘요.
그때 요페 쪽에서 갑자기 끼긱, 끼기기긱, 하는 소음이 났다. 이안과 차터는 귀를 틀어막으며 요페 쪽을 보았다. 요페가 사다리를 접고 자루를 펴고 있었다. 이안과 차터는 요페를 도와 땅에 떨어진 플라스틱 가지를 자루에 담았다. 이안이 골똘히 생각하다 물었다.
가지 1달에 한 번 몰아서 자르면 안 돼요? 몇 주 안 잘라도 밖에서 보기엔 티 안 날 거 같아서요.
요페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돼요. 본부에 찍혀요. 본부는 저희의 일이랑 정비 도구를 관리하는 곳인데 엄청 깐깐해요.
이안은 요페의 낡은 사다리를 가리켰다.
저 사다리 그냥 쓰라고 했던 것도 본부예요?
네.
너무하네요. 장비가 좋아야 일 효율도 올라갈텐데.
차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산 때문이 아니라 저흴 차별해서 새 거 안 사주는 거예요. 제 친구 중에 ‘은하수를 노래하는 마즈카’라는 볼에서 마즈카 옷 관리하는 애가 있거든요? 걘 어제 본부가 신형 스팀다리미 보급해줬댔어요.
이안은 순간 알아챘다. 요페와 차터가 겪고 있는 일과 최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연관되어 있단 걸.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