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볼> 2부

스노우볼에 관한 흑빛 상상

by 인플리

도셜 스노우볼은 최근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경쟁사 카벨 스노우볼의 급성장과 관련된 사건 때문이었다. 도셜은 세계 최대 규모의 스노우볼 제조사로, 지난 90여 년간 시장 1위 자리를 공고히 지켜왔다. 자체 제작 볼과 세계 각지의 의뢰로 만드는 주문 제작 볼을 합치면 연간 생산량은 천만 개에 달했다. 도셜의 상품기획실은 각각 메가 히트작을 보유한 4개의 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안이 속한 마을 팀은 도셜의 최초 히트작이자 시그니처로서, 마을 팀에 안정적인 입지를 부여한 ‘눈꽃에 휩싸인 마을’을, 관광명소 팀은 ‘에펠탑 앞 키스하는 연인’을, 크리스마스 팀은 ‘선물을 포장하는 산타와 루돌프’를, 캐릭터 팀은 최근 흥행한 애니메이션 영화에 기반한 ‘은하수를 노래하는 마즈카’를 주력 상품으로 도셜의 성장을 이끌어 왔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카벨이 히트작을 출시하며 도셜의 매출을 매섭게 추격해왔다. 히트작의 이름은 ‘빛의 정령들’. 인기 록밴드 ‘히잔’의 데뷔 1주년 기념으로 팬클럽 ‘마이히잔’에서 의뢰한 주문 제작 볼이었다. 볼엔 히잔의 데뷔 무대가 생생히 담겨 있었다. 까만 숲 속에서 각각 보컬, 기타, 드럼, 피아노를 맡은 4명의 멤버가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였다. 전원을 켜면 데뷔곡 <그린 드럼>이 흘러나왔다. 음악에 맞춰 볼 받침대에 설치된 검정 스크린에 가사가 떴는데, 팬들이 떼창하는 아래 후렴구는 에메랄드색으로 반짝이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beat, beat, beat the green drum

번잡한 세상을 음 소거해

heat, heat, heat the cold world

삭막한 세상도 음 소거해


사실 이 볼의 제작 의뢰는 도셜이 가장 먼저 받았었다. 마이히잔 측은 데뷔 무대와 가사가 뜨는 스크린이 있은 제품 디자인컨셉을 도셜 캐릭터 팀에 전달하며 주문 제작 가능 여부를 물었다. 캐릭터 팀의 강은하 팀장은 이 볼의 상품성을 알아보았다. 곧바로 상품기획실 실장에게 제작 승인 결재를 요청했다.


주문 수량이 100개라 좀 적지만 잘 만들어서 입소문 나면 아이돌 굿즈 시장에서 대박 날 것 같아요.


실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가 극성 팬질 용품까지 다 상품화해줄 만큼 한가한 줄 알아?


반려 의사를 전달받은 마이히잔은 아쉬워하며 시장 2위인 카벨에 볼 제작을 의뢰했다. 카벨의 한 임원은 이 볼에서 소위 ‘대박 냄새’를 맡았다. 승인, 계약, 제작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고, 결과는 대히트였다. 이 볼은 히잔의 인기 상승세에 힙입어, ‘데뷔 무대 박제 볼’이란 별칭과 함께, 데뷔 1주년을 맞은 다양한 아이돌의 팬들에 의해 수없이 변주되었다. 이 볼이 아이돌 팬 기본 굿즈로 자리 잡자 카벨은 자사 매출 신기록을 연이어 갈아치웠다. 밀려드는 주문에 이 볼만 전담 생산하는 1만 평 부지의 공장까지 새로 지을 정도였다. 도셜 회장은 노발대발하며 실장을 경질시켰고 영업팀을 이끌던 정연진 팀장을 새 실장으로 앉혔다.


걔 진짜 독한 애야. 고과에 들어가지도 않는 신입 연수 과제도 3일 밤새워서 했다니까.


이안은 정연진 팀장과 입사 동기인 마을 팀의 최정헌 팀장이 정 실장의 욕심에 혀를 내두르는 것을 보았다. 특히 정 실장이 회장의 승인 하에 내년 팀별 스노우볼 생산계획을 싹 갈아엎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최 팀장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마을 팀의 생산량은 원래대로라면 올해 대비 증가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정 실장이 우리 생산량 삭감하면 어떡하지.


마을 팀의 이경아 과장이 달래듯 말했다.


걱정마세요. 저희 팀 올해 매출 관광명소 팀이나 크리스마스 팀보단 높았잖아요. 이상한 억지는 못 부릴 거예요.

글쎄. 근데 우리 팀 총매출은 3년 연속 하락세잖아. 그대로 둘까?


최 팀장의 말에 이안도 불안해졌다. 3주 뒤, 생산계획 조정안 발표일에 비보가 날아들지 않길 바라는 건 이안 뿐이 아니었다. 다른 팀 직원들도 휴게실, 구내식당 대기 줄 모이는 곳마다 어두운 표정으로 생산량 삭감을 예상했다. 네 팀 중 올해 유일하게 매출이 오른 캐릭터 팀만 분위기가 괜찮아 보였다.



도셜 스노우볼 생산번호 20164번, 눈꽃에 휩싸인 마을 정비 완료. 요페 트리 가지치기, 차터 집 외벽 페인트 덧칠 마무리했습니다.


무전으로 업무 보고를 마친 요페, 차터, 이안은 1층 벽난로 주위에 둘러앉았다. 이안은 둘에게 도셜의 최근 사태를 들려주었다. 요페가 한숨을 쉬었다.


내년 마을 볼 생산량 확 줄인다고 하면 어떡하죠?


벽난로를 바라보던 차터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본부가 저희 강제 이직시킬 수도 있겠네요.


요페는 본부가 매년 초, 전 세계 스노우볼의 종류와 필요한 정비 업무를 총 집계한 후, 빌로벨에게 업무를 배정한다고 설명해주었다. 보통 숙련된 업무를 재배정하지만, 신규 업무 수요가 늘면, 빌로벨 몇몇을 갑자기 차출해 신규 업무에 투입한다 했다. 이안이 물었다.


차출 거부하면요?

백수 되는 거죠. 저희에겐 일 선택권이 없거든요.


차터는 벽난로 안에 땔감을 던져 넣으며 말했다.


옷 다림질 일만 안 왔으면 좋겠어요, 전.


차터는 스팀다리미를 새로 배정받았다던 친구 일을 구경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 친구는 올해 초, 신규 출시된 볼, ‘은하수를 노래하는 마즈카’의 옷 관리 업무로 갑자기 차출되었는데, 일이 손에 안 익어서 여름휴가 전날 밤늦게까지 다림질에 매달렸다 했다. 마즈카의 스커트 칼주름잡는 일에 진땀을 빼면서.


요페가 차터에게 말했다.

그래도 다림질이 개털 미용보단 쉬울걸?


요페는 아는 언니가 마즈카 볼에서 마즈카 옆에 있는 반려견 호포의 미용 담당으로 차출되었다고 전했다. 호포의 품종은 비숑 프리제인데, 언니가 둥글어야 할 얼굴 털을 납작하게 깎는 실수를 반복해서 개 얼굴이 바보 같아지곤 했다며 웃었다. 붙임 털로 얼굴 모양을 수습하는 비용을 본부가 언니의 월급에서 빼갔다고 하자, 차터가 분통을 터뜨렸다.


못된 놈들. 초반엔 실수할 수도 있지. 그럼 난 최대한 지금 하는 일이랑 비슷한 에펠탑 관리 같은 일 받는 게 낫겠어.


요페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네. 적어도 건물은 트리처럼 자라진 않으니까.


응 녹은 슬지만. 그래도 녹 방지 스프레이 뿌리는 게 페인트칠이랑 그나마 비슷한 일이지 않겠어? 근데 그 스프레이 냄새 독하던데?


요페의 말에 차터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안은 차터가 독한 냄새를 참으며 에펠탑에 서 있는 모습이 상상되어 마음이 아팠다. 정 실장의 마을 볼 생산량 조정 결과는 이안네 팀의 운명뿐 아니라 요페와 차터의 운명까지 좌우할 것이었다.


볼 바깥세상이랑 볼 안 세상이 이렇게 깊게 연결되어 있다니.


이안은 자신이 속한 세상이 출렁이면, 갓 알게 된 친구들의 세상이 그보다 더 크게 출렁이게 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이안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요페가 달래며 말했다.


너무 걱정말아요. 우리 둘 다 손재주가 좋은 편이라, 다른 일도 적응 잘할 거예요.


그때 벽시계에서 8시 알람이 울렸다. 어느새 이안의 출근 준비 시간이었다. 이안이 인사를 건넸다.


또 소식 있으면 전하러 올게요.


요페가 말했다.


소식 같은 거 없어도 자주 와요. 우리 딱 1달만 만날 수 있으니까.



이안은 이후 3주 동안 거의 매일 스노우볼을 들락거렸다. 점심시간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여자휴게실에서 자는 척하며 스노우볼에 들어갔다. 밤에도 주호에게 일찍 자자고 재촉하며 볼에 들어갔다(주호는 이안이 더 이상 자기 전에 볼을 보지 않자 좋아하는 눈치였다). 이안, 요페, 차터의 사이는 점점 돈독해졌다. 함께 본부에서 배급한 간식을 나눠 먹었고—웩. 오트밀 비스킷은 사료 맛인데요—, 다락방에 모여 앉아 플라스틱 눈 회오리를 함께 감상했다. 도셜과 본부 뒷담도 실컷 나눴다. 요페와 차터는 정 실장 때문인지 한층 이안에게 예민하게 구는 최 팀장을 이안과 함께 욕해주었고—열등감에 쩔어 있네요—, 이안은 새 사다리를 달라고 다시 요청하자, 사다리보다 10배는 싼 소음 차단 귀마개를 대신 보급해줬다는 본부에게 쌍욕을—지랄도 참신하네요— 해주었다. 이안은 스노우볼에서 요페와 차터를 만나고 올 때마다 뾰족했던 마음이 함박눈처럼 동글동글 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느덧 생산계획 조정안 발표일이 다가왔다. 발표 30분 전, 이안은 이 과장, 최 팀장과 사내 카페에서 팀별 생산량 조정 결과를 점쳤다. 최 팀장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동정하듯 말했다.


관광명소 팀 생산량이 많이 깎일 거 같아. 올해 기념품 샵 매출이 거의 반 토막 났대.


이 과장이 카푸치노 거품을 입가에 묻힌 채, 다소 과하게 맞장구를 쳤다.


그럴 만하죠! 요즘 기념품 샵 인기 선물은 키링이거든요. 가볍고 디자인도 예쁘니까. 아, 크리스마스 팀도 상황이 안 좋다던대요? 요즘 크리스마스 때 거리에 캐럴도 안 울리고, 예전만큼 선물을 활발하게 주고받진 않잖아요. 매출이 떨어질 만하죠.


이 과장은 최 팀장의 심기를 건드린 오전 일을 만회하려고 다른 팀을 깎아내리려 더 애를 쓰는 듯했다. 히잔의 메인보컬 라미의 사진을 책상에 붙였다가, 최 팀장으로부터 회장님한테 찍히기 전에 당장 사진을 갖다 버리라는 호된 잔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과장이 좀 거들어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통에 이안도 휴게실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캐릭터 팀도 매출이 크게 오른 건 아니더라고요. 자기들끼리도 올해엔 마즈카 영화에 숟가락 잘 얹어서 어찌어찌 잘 된 거라 하더라고요.


이 과장이 재빨리 덧붙였다.


캐릭터 팀 내년엔 큰일 났는데요? 마즈 카 2편 제작한다곤 하는데, 2편은 보통 1편보다 잘 안되잖아요. 아이고 캐릭터 팀 내년에 땡처리 이벤트 하느라 죽어나겠고만.


오버하지 마.


핀잔주듯 말했지만 최 팀장은 이 과장의 빈정거림이 싫진 않은 눈치였다. 최 팀장과 캐릭터 팀의 강 팀장은 사내에서 유명한 앙숙이었다. 3년 전, 입지가 안정적인 마을 팀 팀장 자리를 놓고 둘이 경쟁을 했는데, 최 팀장이 팀장으로 최종 임명되었다. 신생팀인 캐릭터 팀 팀장으로 밀려난 강 팀장이 최 팀장을 ‘운빨 좋은 능구렁이’라고 흉을 보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고, 최 팀장은 뒤에서 강 팀장을 ‘추한 패배자’라고 욕하며 맞불을 놓았다. 이후 둘은 서로 마주쳐도 인사도 안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안은 최 팀장이 마을 팀 생산량이 오르길 바라는 만큼, 캐릭터 팀 생산량이 떨어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3시 정각. 생산계획 조정안 발표가 시작되었다. 정 실장이 대회의실 스크린 앞에 섰다.


발표에 앞서, 내년에 압도적 매출 신장을 이루기 위해 팀별 생산량 계획의 전면 수정이 불가피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참석한 상품기획실 직원 40여 명을 둘러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소란하던 장내가 싸늘해졌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먼저, 마을 팀. 생산량 올해 대비 20% 감축 예정입니다.


헉. 이안의 목에서 탄식이 튀어나왔다. 옆을 보니 최 팀장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고, 이 과장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화면에 3년째 하락 중인 마을 팀 매출 그래프를 띄우며 정 실장이 말했다.


하락세를 마을 팀 탓으로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화면이 10년째 꾸준히 상승 중인 전체 국토 대비 도시화 비율 그래프와 모던한 키즈 카페, 깔끔한 아파트 놀이터 사진으로 바뀌었다.


도시화라는 거시적 트렌드의 영향이 컸죠. 도셜의 메인 타깃인 10대들은 거의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자랍니다. 마을을 저희 세대처럼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특별한 장소론 잘 여기지 않아요. 마을 볼에 대한 관심이 적을 만하죠.


화면에 시대별 마을 스노우볼 디자인 변천사가 떴다.


물론 시그니처인 ‘눈꽃에 휩싸인 마을’만큼은 꾸준한 디자인 업그레이드로 매출 1등 공신 역할을 톡톡히 해왔습니다. 하지만 올해 이 볼의 핵심 구매층은, 대부분 30대 여성이었습니다. 전 매출 신장을 위해서는 10대에게 더 포커스 된 볼 생산에 주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 실장이 화면에 마찬가지로 지난 3년간 내리막을 그리고 있는 관광명소 팀과 크리스마스 팀의 매출 그래프를 띄웠다. 저조한 10대 구매율 그래프가 함께 뜨자, 양 팀 팀장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관광명소 팀과 크리스마스 팀도 10대에게 어필하는 데 실패한 건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양 팀의 이목이 정 실장의 입에 쏠렸다.


관광명소나 크리스마스 관련 볼은 프로모션으로 매출을 부활시킬 거리가 많습니다. 다양한 연령을 타깃팅해서요. 예로 관광명소 팀의 ‘에펠탑 앞 키스하는 연인’은 신혼부부나 커플 배낭여행객을 타깃팅한 여행 프로모션에 붙일 수 있겠죠. 볼 안의 연인 모형 얼굴을 그들의 실제 얼굴과 닮게 만들어주면 세상에서 하나뿐인 기념품이 될 거예요. 크리스마스 팀의 ‘선물을 포장하는 산타와 루돌프’는 이벤트를 열기 좋죠. 대형 모형을 시청 광장 앞에 만들고, 선물상자 안에 들어 있는 선물을 맞추는 시민에게 실제로 그 선물을 증정한다고 하면 SNS에서 화제가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아이디어들을 고려해서, 두 팀의 생산량은 올해와 동일하게 유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관광명소 팀과 크리스마스 팀의 분위기는 환해졌다. 몇몇 팀원들은 구체적인 프로모션 아이디어까지 고안해 온 정 실장에게 감탄하는 눈치였다. 이안은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마을 스노우볼은 이안이 처음 접한 스노우볼이자, 스노우볼 중에 가장 깊은 애착을 갖고 있는 볼이었다. 어릴 적,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할머니는 이안의 조막만 한 손에 도셜의 초대 마을 스노우볼을 쥐어주시고, 양손으로 이안의 손을 감싸 천천히 흔들어주시곤 했다. 볼에 푹 빠진 이안을 꼭 안아주며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스노우볼을 흔들면 마을에 겨울이 온단다.


할머니와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해 오며 도셜 마을 팀에 입사까지 한 이안이었다.


삭감은 꼭 막아야 해.


이안이 합당한 이의제기를 생각하려 머리를 쥐어짜는 동안 정 실장은 화면을 넘겼다.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