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볼에 관한 흑빛 상상
카벨의 히잔 스노우볼 사진이 떴고, 웅성거리던 장내는 다시 숙연해졌다. 캐릭터 팀 팀원 몇몇은 히트작을 놓친 아쉬움에 탄식했다.
저희의 뼈아픈 패착, 모두 기억하시죠? 하지만 카벨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볼의 아이디어는 카벨이 아니라 마이히잔에서 나온 거고요, 최근 이 볼 구매 후기엔 멤버별 얼굴 재현성을 높여달라는 항의 악플도 많이 달리고 있어요.
보컬 라미 모형의 얼굴이 확대되어 화면에 꽉 찼다. 작은 눈이 라미의 매력 포인트인데, 모형의 눈은 만화 캐릭터처럼 컸다. 야유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풉, 라미 엄마도 못 알아보겠네.
이 과장이 킬킬거렸다. 사실 카벨이 조악한 품질 때문에 악플 세례를 받은 건 이번뿐이 아니었다. 이안도 작년 말, 카벨이 신규 출시한 한 크리스마스 스노우볼 혹평 후기를 팀 그룹 채팅방에 공유한 적이 있었다. ‘대충 만드니까 좋냐?’ 라는 구매 후기 글 아래엔 스노우볼 천장에 둥둥 뜬 산타 모형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접착 공정을 대충해서 산타가 바닥에서 떨어진 듯했다. 이안은 비꼬는 투로 채팅방에 감상을 올렸다.
카벨의 신상, 하늘을 나는 산타입니다. 큭큭…
이 과장은 한술 더 떠 맞장구를 쳤다.
산타가 루돌프 없이 하늘을 날다니. 슈퍼맨을 겸직하나 보군요!
최 팀장도 한마디 했다.
산타도 투잡 뛰어야지. 요즘 같은 때에 겨울 한 철 장사해서 먹고살겠어?
채팅방을 회상하며 웃던 이안의 귀에 정 실장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셜이라면 이 볼보다 훨씬 더 좋은 아이돌 관련 스노우볼을 기획, 제작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올해 좋은 성적을 낸 캐릭터 팀의 선례를 참고해보죠.
화면에 ‘은하수를 노래하는 마즈카’ 스노우볼이 떴다. 볼 안엔 하얀 테니스 스커트를 입은 외계인 마즈카와 얼굴이 동그란 반려견 호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이 볼은 전원이 켜지면 쌓여있는 별가루가 별 눈처럼 흩날리는 효과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정 실장은 화면에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이는 10대의 마즈카 볼 구매량 그래프를 띄우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10대들 사이에서 마즈카 볼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캐릭터 팀의 내년 생산량은 올해 대비 20% 증대로 결정했습니다. 이 중 10%는 2편 흥행도 기대되는 마즈카 볼 생산에, 10%는 새로운 아이돌 스노우볼 생산에 할당해주세요.
이안은 강 팀장이 팀원들과 환호하다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최 팀장을 흘깃 바라보는 것을 목격했다. 이안은 그런 강 팀장이 너무 얄미웠다.
발표 이상입니다. 질문받겠습니다.
정 실장이 질의응답을 시작하자 최 팀장이 바로 손을 들었다.
실장님, 매출 신장을 위해 핵심 구매층인 10대 타깃팅에 집중한다는 큰 틀의 방향성엔 동의합니다. 하지만 도셜의 시그니처인 마을 생산량을 대폭 줄이고 아이돌 스노우볼 생산량을 늘리는 건,
최 팀장이 단어를 신중히 골랐다.
······경쟁자인 카벨을 과하게 의식하는 것처럼 비치진 않을까요?
카벨 똥꼬나 쫓겠다는 거야 뭐야, 라는 최 팀장의 비아냥을 옆에서 들었던 이안은 비아냥을 점잖게 바꾼 최 팀장의 솜씨에 감탄했다. 최 팀장은 계속 말했다.
마을 볼은 도셜의 클래식입니다. 도셜의 아이덴티티가 들어 있죠. 마을 팀 생산량을 올려주신다면, 10대에게 통할 만한 매력적인 마을 디자인을 새로······
이의 있습니다.
강 팀장이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마을만 도셜의 클래식이 되란 법 있나요? 캐릭터 볼이나 아이돌 볼도 잘 만들면 클래식이 될 수 있어요. 그리고 실장님이 요즘 10대들한텐 마을보다 도시가 익숙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요. 10대에게 통할 만한 마을을 만든다는 건 좀 억지스럽지 않나요?
억지요?
최 팀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둘의 불화를 잘 아는 직원들은 테니스 경기 관중처럼 고개를 번갈아 좌우로 돌리며 둘의 설전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정 실장이 나섰다.
그만. 정리하겠습니다. 두 팀장님 의견 모두 일리가 있어요. 마을 디자인 리뉴얼, 새 클래식 개발 다 필요하죠. 그런데 최 팀장님, 저도 강 팀장님 말처럼 10대가 좋아할 만한 마을 볼 디자인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아요. 음······ 이렇게 하죠. 다음 주까지 새로운 마을 볼의 구체적인 디자인 컨셉을 주시면 생산량을 감축하지 않아도 될지 한 번 검토는 해보겠습니다. 다른 팀 생산량은 오늘 발표대로 구요. 이상, 마치겠습니다.
다른 팀이 회의실을 모두 나간 후에도, 최 팀장은 분이 삭질 않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골랐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이 과장 옆에서 이안도 화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마을 볼의 전망만 부정적으로 보는 정 실장이 이해되지 않았다. 최 팀장이 적막을 깨며 말했다.
오늘부터 마을 디자인 리뉴얼에 올인해. 10대에 포커스 해서. 볼 안에 있는 모형 형태를 좀 바꿔도 좋고, 지금 있는 조명이나 음악 같이 관심 끌 만한 요소를 더해도 좋아. 대신 ‘마을 볼’인 건 확실히 느껴져야 된다. 회의는 모레 5시야.
최 팀장은 단호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생산량 계속 줄면 팀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이안은 오후 내내 자료와 씨름했다. 절박했다. 마을 볼이 없어지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으니까. 저녁도 자리에서 빵으로 때웠다. 각종 10대 트렌드 분석 기사나 10대 인기 제품 디자인을 살폈지만,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자정쯤, 꽉 막힌 머리로 퇴근하는데 주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호는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로 일하는데, 요즘 동물 부족 간 전쟁 게임에 들어갈 대사를 쓰느라 바빴다. 주호는 막 코끼리 부족에게 돌격하는 호랑이 부족장의 대사가 떠올랐다며 자랑했다.
‘보아라. 상아 아래 감춰진, 벌벌 떠는 입술을’ 어때? 좋지?
좋네에. 그림이 확 그려지고······
뭐야. 목소리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이안은 주호에게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며 물었다.
뭐 획기적인 아이디어 없을까?
흠······ 혹시 지금 거에 조명이나 음악은 어떻게 추가됐는지 알아? 난 글 안 풀릴 땐 선배들이 아이디어 어떻게 떠올렸는지 많이 참고하거든.
글쎄.
회사에 자료 없어?
옛날 기록은 잘 없지. 완전 옛날 사람이 기획한 거라 만나서 물어볼 수도 없고…
순간, 이안의 머릿속에 요페에게 묻지 않았던 궁금증이 떠올랐다. 볼에 초대된 바깥사람에 대한 기억이 빌로벨에겐 지워지지 않는다면, 요페나 차터도 조명이나 음악을 볼에 더한 바깥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을까. 이안은 통화를 마치자마자 볼에 들어갔다.
요페는 트리에 살충제를 뿌리고 있었다. 차터는 다락방 창문을 닦느라 열심이었다. 이안은 마을 볼 생산량이 어떻게 됐냐는 둘에게 거짓말을 했다.
아, 발표 다음 주로 미뤄졌어요.
아직 생산량을 유지하거나 증대시킬 기회가 남아 있었다. 이안은 괜히 생산량이 내년엔 20%나 줄 수도 있다는, 미확정된 소식을 전해 요페와 차터를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명이나 음악 기획자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묻는 이안에게 요페가 답했다.
음악 기획자 이야기는 할아버지한테 들어봤어요.
그분은 어떻게 음악을 볼에 더한다는 생각을 하셨대요?
그분은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오셨는데요, 어느 날 노래를 하나 불러주셨대요. 할아버지는 그 노래가 너무 좋았대요. 그런데 1달 뒤에 그분이 나가면 그 노래를 들을 수 없잖아요? 그분이 바깥에서 그 노래를 틀어도 인로디아엔 안 들릴 거고. 그분이 할아버지의 고민을 듣고 며칠간 연구하다 볼 내장 음악 장치를 개발하셨댔어요.
이안은 신기했다. 음악이 볼 안의 빌로벨을 위해 개발된 거였다니. 그리고 그 음악을 통해 스노우볼이 볼 바깥사람에게 더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니. 볼 바깥 세계에서의 고민의 생각보다 볼 안 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안은 자신도 이 연결고리를 중점적으로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오후, 이 과장은 이안에게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이안, 스낵 마을 어때? 볼 안 모형이 다 스낵 디자인인 거지. 사탕 트리, 과자 집······
과자 집, 하면 왠지 헨젤과 그레텔이 떠올라요.
이 과장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안 되겠다. 남매 모형만 붙이면 캐릭터 팀 볼 같겠네.
휴, 너무 어렵네요.
조금만 더 고민해 보자.
이안은 이 과장과 함께 새벽 1시까지 머리를 싸맸지만, 수확이 없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머리를 쥐어짜던 이안의 눈에 협탁 위에 놓인 스노우볼이 들어왔다. 심장이 아렸다. 이안에게 스노우볼은 더 이상 장난감 세상이 아니었다. 비슷한 불안을 지닌 친구들이 사는, 자신과 긴밀히 연관된 세상이었다. 도시화와 경쟁사의 급성장이라는 거대한 눈 폭풍 속에서 함께 진통을 겪고 있었으니까.
이안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전까진 스노우볼에 안 들어갈 생각이었다. 이안을 기다릴 요페와 차터에겐 미안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마을 팀도 지키고, 요페와 차터가 다른 업무로 갑자기 차출되는 일도 막고 싶었다.
뭘 더해야 빌로벨한테도 좋고, 바깥사람한테도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10대 인기 상품을 쭉 분석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새벽 3시쯤, 이안은 걱정에 휩싸였다.
마을 볼 생산량 못 늘리면 어떡하지. 우리 팀은 몇 년 뒤엔 없어지려나? 요페랑 차터한텐 어떻게 얘기하지······
다음날 오후 2시. 회의 3시간 전이었지만 이안의 문서는 여전히 백지였다. 이안은 집에서 가져온 마을 스노우볼을 기도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 과장이 혀를 찼다.
자료나 봐. 그거 본다고 뭐 새로운 게 보이겠어? 트리랑 집이랑 눈사람뿐인데.
아니에요.
빌로벨도 있어요, 라고 이어 말하려던 이안에게 문득, 영감이 스쳤다.
마을을 정비하는 빌로벨을 표현해보면 어떨까.
볼에 초대된 도셜 직원만, 그것도 딱 1달만 빌로벨의 작업을 볼 수 있었다. 이안은 바깥사람의 환상이 빌로벨의 노력 덕에 유지된단 것을 누구나,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길 바랐다. 그럼 빌로벨은 자부심을, 바깥사람은 고마움과 흥미를 느낄 수 있어서 좋지 않을까. 이 과장도 이안의 아이디어를 듣고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표현 장치로 미니 빔 프로젝터를 제안했다.
미니 빔이 요즘 10대 자녀 선물로 인기래. 10대 타깃팅에도 딱일 거 같아.
둘은 곧 마을 리뉴얼 디자인 컨셉을 완성했다. 볼 받침대에 내장된 미니 빔을 벽에 쏘면, 마을 이곳저곳을 정비하는 빌로벨이 나타나는 디자인이었다. 이안은 요페와 차터를 떠올리며 빌로벨 이미지를 쓱쓱 스케치했다. 트리 가지를 다듬는 빌로벨, 살충제를 뿌리는 빌로벨, 로프를 타고 집 외벽 페인트를 칠하는 빌로벨, 다락방 창문을 닦는 빌로벨······
오후 5시, 이안과 이 과장은 ‘마을을 가꾸는 빌로벨과 미니 빔’이란 제목의 파일을 들고 당당히 회의실로 향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