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몸> 3부

유전자 디자인에 관한 흑빛 상상

by 인플리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입니다!

전 해설지가 다 젖었어요!


흐름대로라면 세인이 5:4를 만들어야 할 아홉 번째 게임. 세인은 하담이 길게 넘긴 공을 코트에 닿기 전에 받아치는 발리 샷을 선보였다. 하지만, 하담이 민첩하게 따라붙어 공을 받아쳤고, 득점했다. 결국 하담이 4:5를 만들어 내자, 하담의 부모님이 만세를 하며 벌떡 일어나는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이하담 승리! 거의 완벽한 수비를 보여줍니다!


세인이 뼈아픈 실책으로 다음 게임도 내주면서, 결국 게임 스코어 4:6으로 하담이 1세트를 따냈다.


이하담! 손세인을 꺾고 1세트를 가져옵니다!


하담 팬들의 환호성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쉬는 시간, 벤치에 앉아서 땀을 닦던 세인의 심장이 불안감에 세차게 두근거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손세인, 디자인 최초로 윔블던 제패’, ‘손세인, 이하담 꺾고 윔블던 트로피를 들어 올리다’와 같은 기사 헤드라인을 상상했던 세인의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헤드라인의 주인공이 뒤바뀔 수도 있다는 극도의 압박감이 몰려왔다.


뭐지? 쉽게 이길 줄 알았는데……


심해진 압박감 때문에 세인은 속이 울렁거리는 거북감을 느꼈다. 라켓 가방을 뒤져 에너지 드링크를 꺼내려는데, 뚜껑에 x 표시가 된 에너지 드링크가 눈에 들어왔다.


딱 한 모금만 마셔볼까.


울렁거림만 조금 가라앉아도 기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인은 막 x 표시가 된 드링크 병을 잡았다. 그런데 순간, 머릿속에 하담의 인터뷰 장면이 스쳤다.


제가 손 선수보다 멘탈이 강하니까요. 스포츠는 결국 멘탈 싸움이거든요.


세인은 오기가 끓어올랐다.


이하담한텐 아무것도 질 수 없어. 어떻게 네이처 따위한테……


세인은 몸과 정신력 모든 면에서 이하담을 압도하고 싶었다.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장면을 되새기며, 세인은 뚜껑에 x 표시가 없는 에너지 드링크를 꺼내 한 모금 마셨다.


2세트 시작합니다. 이하담의 서브.


마음을 다잡은 뒤, 세인은 다시 하담을 마주했다. 하담의 서브를 온 힘으로 받아쳤다. 하담이 다시 받아친 공은 아슬아슬하게 라인 밖으로 나갔다. 세인은 득점 후, 체력이 떨어진 하담을 계속 속공으로 몰아세웠고, 2세트 첫 게임을 따냈다. 세인이 상승세를 이어 다음 게임도 따내면서 게임 스코어는 2:0이 되었다. 게임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자 울렁거림도 조금 가라앉았다.


손세인 선수! 1세트보다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네요!


네. 자신의 경기 흐름을 되찾은 것 같죠?


이어진 게임은 하담이 따냈지만, 세인이 다시 내리 2게임을 따면서 게임 스코어는 4:1이 되었다. 표정이 어두워질 법도 한데, 하담은 차분히 경기에 임하고 있었다.


솔직히 쫄리지? 잘도 숨기네.


세인은 자신감 있게 다음 게임을 시작했다. 세인의 서브 게임이었다. 하지만 잠시 들뜬 사이에 집중력이 흩어져 연속 서브 실책을 했다.


손세인, 더블 폴트!


중요한 때에 흔들리네요.


하담은 세인이 흔들린 틈을 파고들며 점수를 따냈다. 코트를 종횡무진 빠르게 가로질렀는데, 마치 세인을 방심시키기 위해 초반에 일부러 지친 척을 한 것으로 보였다. 내리 3게임을 이긴 하담은 순식간에 4:4 동점을 만들었다. 이 위원이 침을 튀기며 흥분을 표출했다.


이하담 선수! 대역전극을 펼치네요!


쉽게 풀리던 경기가 꼬이자, 긴장감 때문에 세인은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다음 게임에서 세인은 포티 대 피프티로 하담을 앞선 상황에서 긴 랠리를 이어갔다. 관중들은 숨죽인 채 고개만 공을 따라 좌우로 돌리며 경기를 지켜봤다. 세인은 회심의 일격으로 하담의 왼쪽 끝으로 깊숙이 공을 보냈다. 하담이 받아친 공은 라인을 벗어나 떨어졌다.


아웃! 손세인 승!


게임 스코어 5 대 4!


한 게임만 더 이기면 2세트는 세인의 승리였다. 세인은 악착같이 달려들었지만, 막아서는 하담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치열한 접전 끝에 게임 스코어는 5:5, 6:5를 거쳐 6:6이 되었다. 캐스터가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아아, 결국 타이브레이크로 넘어가네요! 이제 7점을 먼저 따는 선수가 2세트 승자가 되는데요, 이하담 선수가 이기면 세트 스코어 2 대 0으로 이하담 선수가 최종 우승, 손세인 선수가 이기면 3세트에서 승자가 가려지게 됩니다.


치솟는 긴장감 때문에 세인은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땀을 닦는 척 고개를 숙이며, 세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참자. 이하담한텐 절대 못 져.


세인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경기를 시작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막상막하의 접전이 펼쳐졌다. 세인이 하담을 따돌리면, 하담이 다시 세인에게 따라붙었다. 점수는 2:0, 2:3, 5:4를 거쳐 6:6이 되었다. 마지막 한 점을 더 따는 선수의 승리였다. 세인의 심장 박동은 거세지며 상체 전체를 뒤흔들었다. 하필 하담이 서브를 할 차례라 상황은 하담에게 유리했다. 세인은 집중력을 남김없이 끌어올렸다. 막 날아드는 공을 쳐다보았는데, 갑자기 코트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보였다. 맞은 편 관중들의 옷 색깔이 회오리처럼 어지러이 뒤섞였다.


어? 어어? 손세인 선수 쓰러집니다!


세인은 라켓을 든 채 오른쪽으로 쓰러졌다. 의료진이 달려 나왔다. 세인의 상태를 확인하려 일어난 관중들로 관중석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기는 중단되었다.



손세인 선수 주치의 신유주 소장이 구속


다음 날, 세인이 누워있는 병실 TV에 속보가 떴다. 네이비색 정장을 입은 아나운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손세인 선수가 윔블던 결승 도중 쓰러진 원인이 밝혀졌습니다. 바로 익스라는 약물인데요, 손 선수의 주치의를 겸직하는 프로블 연구소의 신유주 소장이 손 선수를 속여 익스를 몰래 투약시킨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현장 연결합니다. 이현우 기자?


화면에 몰려든 취재진을 배경으로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자가 등장했다.


네, 저는 지금 프로블 연구소 앞에 나와 있습니다. 신 소장은 경기 전, 손 선수에게 긴장해서 속이 울렁거리면 감정 기복 조절 약물인 익스를 넣은, 뚜껑에 x 표시를 한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라고 권했다는데요, 신 소장은 사실 x 표시와 상관없이 모든 에너지 드링크에 익스를 넣었다고 합니다.


자료화면으로 뚜껑에 x 표시가 없는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는 세인의 모습이 떴다.


손 선수가 원치 않았음에도 익스를 투약하게 된 것이군요. 그런데 그 익스의 구성 성분도 충격적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익스엔 바로 이하담 선수의 유전자 추출 물질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아니, 라이벌 선수의 유전자를 몸에 주입하려 하다니, 신 소장은 왜 그런 끔찍한 짓을 한 겁니까?


손 선수의 약한 멘탈을 보강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신 소장은 손 선수 주치의로 선임되기 전부터 이미 이 선수의 유전자를 활용한 약물을 비밀리에 개발해 왔는데요, 이 선수 측은 프로블에 유전자를 기증할 때 연구를 위한 활용엔 동의했지만, 약물 개발을 위한 활용엔 동의한 적이 없다며, 신 소장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 소장의 악행은 어떻게 밝혀지게 된 거죠?


프로블 연구소의 한 연구원의 제보로 밝혀졌습니다. 제보 통화 내용, 들어보시죠.


음성변조 된 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 프로블에서 유전자 보관 키트를 관리하는 일을 하는데요, 소장님이 작년에 저희 팀 사람들만 출입할 수 있는 키트 저장실에서 몰래 나오시는 걸 봤습니다. 확인해보니까 이하담 선수 키트가 없어졌더라고요. 키트를 되돌려달라고 요청했더니, 대표님 허락하에 진행하는 비밀 프로젝트에서 쓰실 거라며, 못 본 일로 하라셨어요. 그 일을 계속 염두에 두고 소장님네 팀을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파쇄기 위에 올려진, 멘탈 강화 약물 개발 프로젝트 문서를 발견했죠. 문서엔 손 선수의 유전자 분석 자료도 상세히 나와 있었습니다.


그럼 이 일에 대표까지 관여가 되었다는 겁니까?


그렇다고 봐요. 대표님이 소장님한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에 손세인을 우승시키라고 압박하신 건 회사 사람들은 다 알아요. 저도 못 본 체하려 했는데 손 선수가 쓰러지는 걸 보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폭로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양심에 따른 소중한 제보, 감사합니다. 그런데 대표는 익스로 뭘 얻을 수 있길래 이렇게 엄청난 프로젝트를 지시한 겁니까?


돈이죠. 손 선수가 이기면 익스를 다른 멘탈 약한 디자인 선수들한테 비싸게 팔면 되고, 이 선수가 이기면 디자인을 이길 만큼 멘탈이 강한 네이처의 유전자라고 해서 유전자 디자인 아이 갖고 싶어 하는 부모들한테 비싸게 팔면 되니까요.


그렇군요. 신 소장은 익스에 왜 네이처인 이 선수의 유전자를 활용한 겁니까? 평소에 네이처를 좀 낮춰 보는 발언을 많이 해 오셨는데요?


아, 소장님은 사실 좋은 네이처에 집착해왔어요. 우수한 네이처 유전자를 많이 확보할수록, 더 훌륭한 디자인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손 선수한테 익스를 실험해서 완벽한 몸뿐 아니라, 완벽한 정신력 쪽에서도 권위자가 되려고 과욕을 부리신 것 같아요.


날 도구로 삼다니.


세인은 배신감에 화를 참지 못하고 TV 속 신 소장의 얼굴을 향해 식판을 던졌다. 액정에 금이 갔는데, 화면이 세인의 얼굴로 바뀌었다. 세인은 조각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