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디자인에 관한 흑빛 상상
뇌 겉껍질 쪽 회색 부분 보이시죠? 여길 회백질이라고 부르는데요, 감정 조절과 인지 기능을 담당하는 곳입니다. 익스는 바로 이 회백질의 부피를 일시적으로 키워서 감정 조절을 더 원활하게 해 줘요.
그거 쓰면 도핑 걸리는 거 아니에요?
코치가 묻자 신 소장이 답했다.
아뇨. 세계반도핑기구의 금지 성분은 하나도 안 썼습니다. 남극에서 서식하는 유일한 단자엽식물꽃인 남극좀새풀 추출물, 시베리아 백표범의 혈액 성분이 주성분이에요. 모두 극한의 환경에서도 오래, 꾸준히 버텨내는 힘을 가진 생물들이죠. 이제 임상 3차도 거의 끝나갑니다.
세인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부작용은 없나요?
임상 2차까진 별문제 없었어요. 예정대로라면 윔블던 결승 전날 임상 3차 결과가 나오는데요, 통과되면 시판이 가능할 정도의 안정성이 보장되는 겁니다.
신 소장은 확신에 찬 얼굴로 세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익스는 세인 씨가 디자인 최초로 윔블던에서 우승하는 데 꼭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면 세인 씨는 감정 조절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정신력과 몸이 모두 완벽한 최초의 디자인 선수로 명성을 떨칠 겁니다.
코치와 몇몇 스태프가 화색을 보였지만, 세인은 찜찜했다.
다들 내가 트레이닝으로는 절대 멘탈을 못 다스릴 걸로 보는 거야?
세인은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멘탈을 강화할 수 있단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세인은 오기가 생겼다.
전 익스 되도록 안 쓰고 싶은데요,
신 소장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쳤다. 세인은 덧붙였다.
아직 대회가 두 달이나 남았잖아요. 우선 트레이닝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요.
신 소장은 세인의 눈치를 살피며 다급히 수습했다.
아, 절대 세인 씨의 멘탈 강화 가능성을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워낙 중요한 대회니까 대비책을 철저하게 마련해 두자는 차원이고요,
신 소장은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멋쩍어하며 홀로그램을 껐다.
그럼 익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시죠.
세인은 신 소장이 부인하긴 했지만, 그때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의심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모두에게 강화된 멘탈을 꼭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세인은 이미지 멘탈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구사하고 싶은 샷을 반복적으로 그려, 실전에 쉽게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오래된 트레이닝 기법이었는데, 최근 장면 재현도를 높인 특수 글라스가 개발되면서 효과가 배가 되고 있었다. 세인이 특수 글라스의 오른쪽 위 버튼을 누르자, 인공지능이 이미지를 조합해, 하담과의 가상 윔블던 결승전 장면을 홀로그램으로 거실에 띄워주었다. 가득 찬 관중석을 배경으로 세인이 하담을 향해 우승을 확정 짓는 날카로운 ‘위닝 샷’을 날리고 있었다. 잔디 코트 우측 라인 끝에 아슬아슬하게 공이 닿았다가 코트 밖으로 튕겨 나가자, 세인이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트레이닝을 반복하는 동안, 어지럼증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결승전 당일 2시간 전. 특집 프로그램, ‘세계 최초 디자인 vs 네이처 윔블던 여자 단식 결승전’이 방영되었다. BGM이 잦아들며 스튜디오가 나타나자, 3명 중 가운데 앉은 캐스터가 상기된 얼굴로 운을 뗐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윔블던 역사상 최초로 여자 단식 결승에서 디자인 선수와 네이처 선수가 맞붙는 날입니다. 디자인 선수는 ‘설계된 천재’ 손세인, 네이처 선수는 ‘타고난 천재’ 이하담입니다. 전 중계를 맡은 캐스터 김서윤입니다. 스튜디오에 두 분의 해설위원 모셨습니다. 각자 소개해 주시죠.
캐스터의 왼쪽에 앉은 파란 안경을 낀 여자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박주혜입니다.
이어서 캐스터 오른쪽에 앉은 체격이 큰 파마머리의 남자가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이석진입니다.
캐스터가 박 위원을 보며 물었다.
박 위원님, 오늘 경기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죠?
네. 누가 윔블던 최초의 디자인 대 네이처 결승의 트로피를 거머쥘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캐스터가 이번엔 이 위원을 보며 물었다.
원래 손 선수와 이 선수는 한 번 겨룰 운명이었죠, 이 위원님?
그렇습니다. 손 선수가 디자인 선수만 겪는 고질적인 질병인 유전자 돌연변이 때문에 2년 전 US 오픈 4강에서 기권패로 물러났었죠. 올라갔으면 결승에서 이 선수와 붙었을 텐데 말입니다. 사실 이 기권패가 손 선수의 탄생 배경을 고려하면 참 안타까운데요, 아시다시피 독보적인 테니스 유망주였던 손세인의 언니, 고 손세은이 마르판 증후군이라는 유전병에서 기인한 심장 기형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요. 고 손세은의 부모님이 언니의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루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손세인 선수를 디자인으로 낳았다고 알려져 있죠.
캐스터가 숙연해진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마르판 증후군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제거하고, 테니스 선수로서 최적의 신체 스펙을 갖추게 할, 최상급 유전자로만 디자인된 만큼 손세인 선수는 여자 테니스 선수 중에서 가장 완벽한 몸을 가졌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자료화면 보시죠.
화면에 세인의 프로필 표가 나타났다. 캐스터가 설명을 덧붙였다.
먼저 손세인 선수는 키 181센티, 몸무게 65킬로그램입니다. 체격이 웬만한 남자 선수 못지않죠. 세계 탑 스포츠 랭커들의 선별된 유전자로 디자인됐고, 테니스에 최적화된 근력, 체력, 지구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열네 살에 프랑스 오픈 주니어 대회 여자 단식에서 최연소로 우승했고, 열다섯 살에 프로로 데뷔했습니다. 올해 스물세 살이죠. 큰 키에서 나오는 파워가 엄청난데요, 서브 최고 속도도 시속 211킬로미터나 됩니다.
세인의 프로필이 하담의 프로필 표로 교체되었다.
다음은 이하담 선수입니다. 올해 스물한 살, 키 172센티, 몸무게 60킬로그램입니다. 손 선수보다 9센티나 작지만 불리한 신체 조건을 스피드로 극복해내고 있습니다. 공 반응속도도 빠른데요, 좋은 수비력으로 지난 US 오픈에서 우승했습니다. 다만, 체력이 약해서 후반으로 갈수록 샷의 정확도가 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무래도 체력이 디자인 선수보단 불리해서인지,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나오면서 승부를 빨리 내려는 경향도 있고요.
박 위원이 끼어들었다.
그런데요, 이하담 선수는 그 불리함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아요. 기자회견장에서 한 기자가 완벽한 몸으로 디자인된 손 선수와 경기하는 건 곧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게 아니냐, 불만은 없냐,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대요. 이제까지 스포츠의 역사가 새로 쓰였던 때는, 모두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기울기가 정반대로 역전될 때였다. 이번 윔블던에서는 내가 그 역전의 주인공이 되겠다.
이 위원이 감탄했다.
이야, 멋진 철학입니다. 스물한 살 선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을 수가 없네요.
캐스터가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 어느 때보다도 승자가 궁금해집니다. 결승전 중계, 잠시 후 시작하겠습니다.
오후 1시, 윔블던의 따사로운 7월 햇살이 관중석 곳곳을 비추었다. 세인이 먼저 가벼운 손 인사를 하며 코트로 입장했다. 세인은 프로블의 로고, 파란색 P가 목 부분에 새겨진 흰색 원피스형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큰 키와 시원시원한 걸음걸이 덕에 유니폼은 더 멋스러워 보였다. 매해 테니스 패셔니스타로 꼽히며 프로블의 광고판 역할을 톡톡히 하기에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뒤이어 아담하지만 단단한 체격을 가진 하담이 입장했다. 하담을 향해 일부 팬들이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로 응원을 보냈다. 두 선수를 향한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세인은 라켓 가방과 수건을 정리하면서 감정을 다스렸다. 다행히 지난밤의 속 울렁거림은 말끔히 없어졌다. 오전 7시에 측정한 GMT 결과도 음성이었다. 신 소장은 세인의 컨디션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며 말했다.
만약 울렁거림이 재발하면 뚜껑에 작은 x 표시를 한 에너지 드링크를 드세요. 익스를 타 뒀거든요. 임상 3차 통과 연락도 받았으니까 안심하고요.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익스에 손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캐스터는 경기 시작 전, 막간을 이용해 경기규칙 소개를 유도했다.
박 위원님, 경기를 보고 계시는 분 중에 테니스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으실 텐데요, 테니스 룰 좀 간단히 소개해 주시죠.
네. 테니스는 우선 점수 체계가 굉장히 독특합니다. 보통 다른 종목은 점수가 1점, 2점, 3점 순으로 올라가죠? 테니스는 점수가 러브라고 부르는 0점에서 시작해서 15점인 피프티, 30점인 써티, 40점인 포티 순으로 올라갑니다. 포티에서 한 점 더 따면 한 게임을 이기게 되죠. 단, 게임 스코어가 포티 대 포티가 되면 듀스라고 해서, 그다음 연속 두 번을 먼저 이겨야만 그 게임의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의원이 이어서 게임 설명을 보충했다.
총 6개의 게임이 한 세트를 이루고요, 여자 단식 결승전은 2개 세트를 먼저 이기는 선수가 최종 우승자가 됩니다. 그리고 세트도 상대보다 두 게임을 앞서야 따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게임 스코어가 6:6이 되면 타이브레이크라고 해서, 7점을 먼저 따는 선수가 이기게 됩니다. 그리고 단식은 보이시는 코트의 안쪽 라인 안에서만 진행되는데요, 공이 라인에서 나가면 아웃, 조금이라도 닿으면 득점으로 인정됩니다.
네, 이 위원님도 설명 감사드립니다. 이제 두 선수 모두 코트에 등판했고요, 이하담의 서브로 1세트 시작합니다.
관중들의 웅성거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하담은 잔디 코트에 왼손으로 공을 세 번 튀긴 뒤 힘껏 들어 올렸다. 공은 대각선 방향으로 깊게 내리꽂혔다.
헉, 빠른데?
세인은 움찔했다. 공 쪽으로 움직였지만, 공은 순식간에 세인의 1미터 앞에 닿았다가 코트 밖으로 튕겨 나갔다. 전광판에 뜬 서브 속도는 시속 154킬로미터였다.
서브 에이스! 손세인이 받아치지 못하면서 이하담이 첫 득점을 합니다!
이하담도 굉장히 빠른 서브를 구사하는군요!
관중들이 하담에게 환호를 보냈다. 세인은 예상보다 더 공격적인 하담의 플레이에 당황했다. 이어진 하담의 서브 볼은 받아쳐 냈지만, 공은 아슬아슬하게 라인을 벗어나서 떨어졌다.
아웃!
이하담, 연속 서브 에이스! 기선 제압에 성공하는군요!
손세인, 아직 몸이 덜 풀렸나요?
만만하게 여긴 하담이 러브 대 써티로 앞서자, 세인은 당혹스러웠다.
정신 차리자. 흔들리면 안 돼.
집중력을 가다듬은 세인이 다음 서브를 받아쳤다. 공을 주고받는 랠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고요해진 경기장엔 공이 라켓에 맞는 소리와 기합 소리만 불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팡, 에아아아흐, 팡, 에아아, 팡…… 헤이아!
세인이 큰 기합 소리를 내며 공을 왼쪽 모서리 쪽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거의 보이지 않는 속도였다. 하담이 따라붙어 쳐냈지만, 공은 네트에 걸렸다.
손세인 득점!
강력한 샷입니다. 세계 랭킹 1위답네요!
세인이 피프티 대 써티로 점수 차를 좁혔지만, 하담은 바로 세인의 상승세를 꺾어버렸다. 하담은 코트 정중앙으로 속공을 보냈고, 공은 세인이 재빨리 뻗은 라켓 위로 지나가 버렸다. 하담은 기세를 몰아 연이어 득점했고, 세인은 결국 첫 게임을 하담에게 내주고 말았다. 하담이 무표정한 얼굴로 왼쪽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하담! 첫 게임을 따냅니다.
물론 서브 게임이라 유리했습니다만, 경기 흐름을 완벽히 지배했죠.
하담의 팬들은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내며 하담의 승리를 축하했다. 예상보다 뛰어난 하담의 실력을 맞닥뜨려 놀랐지만, 세인은 애써 벤치에 앉아 마음을 다스렸다.
괜찮아, 다음은 내 서브야.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세인은 살짝 오른편에 서 있는 하담의 위치를 확인하고 서브를 넣었다. 코트 가운데로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향한 공은 순식간에 코트에 튕겼다가, 하담이 라켓을 뻗기도 전에 코트 밖으로 나갔다.
서브에이스! 서브 속도 185!
대단합니다! 장신에서 나오는 파워가 엄청나네요!
서브로 기선 제압에 성공한 세인은 하담의 맹점인 체력을 공략했다. 공을 좌우 끝으로 번갈아 보내면서 하담이 체력을 많이 소모하도록 유도했다. 그런데, 하담이 코트의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으로 재빨리 달려와 받아쳐 낸 공을 세인이 놓치고 말았다.
이하담 득점! 저걸 막아내네요!
세인은 최대한 끌어올린 집중력으로 두 번째 게임은 이겼지만, 이후 하담과 점수를 한 점씩 주고받으며 팽팽한 접전을 이어갔다. 게임 스코어가 1:1에서 2:1, 2:2, 3:2, 3:3, 4:3, 4:4로 엎치락뒤치락 이어지자, 관중석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