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디자인에 관한 흑빛 상상
후우.
후우.
세인은 소파에 누워 숨을 깊게 내쉬었다. 속을 울렁거리게 하는 긴장감을 뱉어내고 싶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바람이라도 좀 쐴까?
세인은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 세인이 걸을 때마다 허벅지에 작은 산맥처럼 솟아오른 대퇴근이 앞뒤로 올록볼록 움직였다. 잔근육이 촘촘히 조각된 팔, 다부지게 벌어진 어깨, 181센티에 달하는 큰 키와 늘씬한 체형까지 놓고 보면, 세인이 테니스 선수로서 ‘완벽한 몸’을 가졌다는 세간의 평가는 정확해 보였다.
창을 열자 밤바람이 훅 끼쳐왔다. 머리카락이 귀 뒤로 펄럭이게 놔둔 채 세인은 5분 정도 서 있었지만, 울렁거림은 가시지 않았다.
설마. 또 돌연변이 생긴 거 아냐?
황급히 거실로 뛰어 들어온 세인은 협탁 위에 있던 유전자 돌연변이 발생 진단기, GMT(Gene Mutation Tracer)를 열었다. GMT 안엔 일회용 채혈침과 알코올 솜 세트,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변이 진단기가 놓여 있었다.
제발……
세인과 같은 ‘디자인’, 즉, 2030년대 후반에 유전자 디자인 기술을 통해 부모가 고른 유전자만으로 태어난 사람은 종종 부작용으로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생해 고통을 받았다.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않고 성급히 도입된 신기술의 이면이었다. 기술 발달로 돌연변이 발생 확률은 점차 낮아지고 있었지만, 모든 디자인은 매일 두세 번씩, GMT로 돌연변이 발생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권장되었다.
세인에게 지난 돌연변이 발생 타이밍은 최악이었다. 2046년 US 오픈 4강 전날 저녁이었다. 갑자기 숨이 가빠와 GMT를 했는데 결과는 양성. 급히 근처 병원으로 이송된 세인에게 의사는 다급히 말했다.
바로 수술하셔야 합니다. 폐 오른쪽에 발생한 돌연변이가 폐 기능을 빠르게 저하시키고 있어요. 늦어지면 산소 부족으로 뇌 손상이 올 거예요.
세인은 기권패를 선언해야 했다. 14세에 프랑스 오픈 주니어 대회에서 최연소 우승을 한 것을 시작으로, ‘기술이 빚은 천재’로 촉망받으며 쌓아 올린 승점으로 세계 랭킹 1위 석권을 앞둔 때였다. 갑작스러운 비극에 세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일정 기간 재활하면 복귀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세인은 화를 누르지 못했다. 사과하러 VIP실로 찾아온 주치의에게 식판을 내던지며 해고를 통보했다. ‘식판 해고’ 사건은 병원 관계자를 통해 언론에 새어나갔고, 감정 기복이 심한 선수라는 세인의 평판은 악화되었다.
세인은 그때의 악몽을 절대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GMT를 시작했다. 알코올 솜으로 닦은 채혈침을 진단기에 끼우자, 진단기가 자동으로 블루투스를 통해 핸드폰에 연결되었다. 침 끝으로 왼손 검지를 살짝 찌르자, 붉은 피가 맺히면서 ‘유전자 돌연변이 진단 중’이란 문구가 떴다. 총 과정은 5초도 걸리지 않았다. 23년째 해 온 숙달된 진단이었다.
제발……
심장박동이 온몸을 뒤흔들 듯이 거세질 때쯤, 결과가 떴다. 음성이었다.
하아아.
긴장이 풀린 세인은 소파 뒤로 축 늘어졌다. 그때 전화가 왔다.
세인 씨, GMT 또 했어요? 한 지 1시간도 안 지났는데 또 알람이 와서요.
주치의 신유주 소장의 연락이었다. 신 소장은 유전자 디자인 기술 분야 업계 1위인 ‘프로블’의 연구소 소장이자 세인의 주치의를 겸직하고 있었다. 전 주치의의 후임으로 선임되어 약 1년 반째 세인을 케어해왔다.
속이 울렁거리는데, 혹시나 해서요.
적혈구 수치 한번 체크해 볼게요. 아무튼,
신 소장은 세인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돌연변이 때문은 절대 아닐 테니까 걱정 말고요.
감사합니다.
신 소장의 독려에 세인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신 소장은 유전자 디자인 기술 특허를 다수 보유한 권위자답게 돌연변이 예방 케어를 체계적으로 해 주었다. 그 덕에 돌연변이는 재발한 적이 없었다. 대회 기간 중엔 GMT 정밀 분석 결과를 세인에게 직접 전해주는 등, 세인을 각별히 챙겼다. 세인은 신 소장이 선임 후 첫 미팅에서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제가 세인 씨를 맡게 된 이상, 앞으로 돌연변이가 재발할 일은 없을 거예요. 세인 씨처럼 ‘완벽한 몸’으로 태어난 디자인이 건강하게 ‘네이처’의 한계를 계속 뛰어넘게 돕는 게 연구자로서의 제 소명이거든요.
‘네이처’란 디자인과 반대로 유전자 디자인 기술을 쓰지 않고 부모의 유전자를 무작위로 물려받아 태어난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다. 세인은 신 소장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녀가 한계라는 단어를 쓰며 은근히 네이처를 낮춰 보는 뉘앙스를 풍긴 것이 은근히 좋았다. 세인 역시 네이처가 디자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몸, 뒤떨어지는 실력, 기존 기록에 머무르는 커리어…… 세인에게 네이처란, 신기술의 혜택을 누릴 기회를 놓친 뒤처진 존재였다.
신 소장의 세심한 케어 덕에 세인은 복귀 6개월 만에 세계 랭킹 1위를 석권해냈다. 해외 유수의 디자인 선수 측에서 신 소장에게 고액의 연봉과 함께 러브콜을 보냈지만, 신 소장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세인의 케어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손세인 선수는 ‘완벽한 몸’으로 그 어떤 네이처도 못 이룬 신기록을 세워왔습니다. 여자 단식 최연소 우승, 여자 선수 서브 최고 기록 경신…… 유전자 디자인 기술이 인류의 스포츠사를 어떻게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지를 명백히 증명해냈죠. 손 선수가 앞으로도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곧 모든 디자인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소장은 마치 세인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듯 했다. 열정적인 헌신을 회상하며 고마움을 느끼고 있던 세인에게 신 소장이 GMT 정밀 분석 결과를 전했다.
특별히 다른 이상은 없네요. 긴장감 수치가 좀 높아서 울렁거림이 있는 것 같은데, 내일이 워낙 특별한 결승전인 걸 감안하면 수치가 높을 만해요. 수치 낮추는 덴 멘탈 트레이닝이 도움 될 거예요. 한 1시간 뒤에도 차도 없으면 연락하고요.
감사합니다.
이번 결승의 특별함은 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윔블던이 최초로 디자인 선수의 출전을 허용한 후 열리게 된, 최초의 디자인 대 네이처 여자 단식 결승전이었기 때문이다. 윔블던은 테니스 4대 메이저 대회―호주 오픈, 롤랑가로스, 윔블던, US 오픈―중 가장 오래된 대회로, 보수적이기로도 유명했다. 윔블던 주최 측은 다음과 같은 입장문을 토대로 디자인 선수의 출전을 금지해왔다.
유전자 디자인 기술은 아직 경제력이 있는 부모만 이용할 수 있습니다. 네이처 선수를 최적의 유전자를 조합해 뛰어난 체력, 근력, 지구력을 갖추고 태어난 디자인 선수와 같은 조건에서 경쟁하게 하는 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윔블던은 네이처 선수들이 부당한 상황을 겪는 것을 원치 않으며, 디자인 선수들은 그들만의 테니스 대회를 따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위 입장문은 스포츠 업계에서 디자인 선수가 소수이던 시절엔 크게 지지받았다. 집안 형편상 네이처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거나, 후천적 노력으로는 선천적 능력을 따라잡을 수 없어 패배감을 느끼는 네이처 선수에 대한 동정 여론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한 네이처 쇼트트랙 선수는 슈퍼 루키로 주목받다가 조기 은퇴 후 코치로 전향하게 된 심정을 SNS에서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디자인 애들한텐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특출함이 있었어요. 그걸 알았을 때의 기분은…… 뭐랄까, 난 죽기 살기로 노력해도 겨우 별이 될까 말까 한데, 저 멀리 손도 안 닿는 곳에 별 무리가 반짝이는 걸 본 것 같았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디자인 선수 중 네이처 선수보다 뒤처지는 선수도 생겨났다. 디자인 선수를 일방적으로 네이처 선수보다 우위에 있다고 볼 순 없다는 인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셰프로 전직한 한 디자인 축구선수는 디자인 선수가 네이처 선수보다 더 혹독한 정신적 압박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을 성토했다.
전 축구광인 부모님 아래서, 축구선수로서 ‘완벽한 몸’으로 설계되어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축구를 곧잘 해서 초등학교 3학년 때 파리 생제르맹 FC 축구 영재 아카데미로 유학도 갔죠. 그런데 거기서 늘 네이처랑 절 비교하시는 코치님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제가 네이처 선수보다 기록이 뭐 하나라도 뒤처지면 그 몸으로도 왜 실력이 그따위냐, 넌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 이런 막말을 하셨거든요. 스트레스 풀 겸 했던 요리에 빠져들어서 파리 요리 학교에 들어가게 됐죠. 이렇게 직업까지 바꾸게 될 줄은 몰랐어요.
디자인 선수들의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는 한 디자인 농구 유망주의 고백으로도 밝혀졌다. 그녀는 어릴 적 아버지의 폭언에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말했다.
중3 때 아버지한테 농구 그만두겠다고 했다가 뺨을 맞았어요. 비싸게 디자인으로 낳아줬는데 ‘몸값’ 안 할 거냐고……
이처럼 디자인 선수들이 자신의 선택도 아닌 부모의 선택에 의해 평생 시달리게 되는 압박감과 좌절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디자인 선수 동정 여론이 네이처 선수 동정 여론을 압도해 나갔다. 한 디자인 선수의 코치는 디자인 선수들의 고통을 호소했다.
누구의 좌절이 더 클까요?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능력을 깨달은 사람과, 부여받은 능력을 아무리 노력해도 발휘할 수 없단 걸 깨달은 사람. 전 후자라고 봅니다.
이렇게 디자인 선수 옹호 여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윔블던 주최 측이 2047년에도 디자인 선수의 출전을 금지하겠다고 발표하자 관련 기사엔 비난 댓글이 쏟아졌다.
el28** : 윔블던 역차별 클라스 보소ㅋㅋㅋ 네이처들끼리 헤쳐 먹겠다는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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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i0**** : 주최 측의 잘못된 판단이 윔블던의 세계적 명성에 먹칠하네요. 디자인 선수가 뭘 잘못했다고 꿈의 무대에 서는 걸 막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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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a**** : 디자인 나오면 네이처 전멸이라도 해? 못하는 디자인도 많은데 개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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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윔블던에 대한 디자인스포츠선수협회의 항의 시위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일부 네이처 선수들이 윔블던 보이콧을 선언하기에 이르자, 윔블던도 백기를 들었다. 2048년부터 유전자 디자인 선수의 출전을 허용하기로 한 것이다. 스포츠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실질적으론 프로블의 막대한 로비가 통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아무튼 어렵게 성사된 대회에서 첫 우승 트로피를 쥘 기회가 세인 앞에 와 있었다. 마침 상대는 세인이 2년 전 기권패한 US 오픈에서 우승한 네이처 선수 이하담이었다.
그때 우승은 운이었단 걸 깨닫게 해주지.
세인은 하담이 한 스포츠 언론사 기자와 했던 우승 소감 인터뷰를 떠올렸다.
이하담 선수, 조금 짓궂은 질문인데요, 만약 손세인 선수가 결승에 올라왔다면 승자가 바뀌었을까요?
하담은 바로 답했다.
아니요. 그래도 제가 이겼을 겁니다.
오, 자신감의 근거는요?
제가 손 선수보다 멘탈이 강하니까요. 스포츠는 결국 멘탈 싸움이거든요.
하담은 시간상 인터뷰를 마무리하려는 기자의 마이크를 붙잡으며 덧붙였다.
아, 이참에 디자인으로 못 낳아준 걸 늘 미안해하시는 부모님께, 강한 멘탈을 물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상 감사를 가장한 도발이었다. 세인은 하담이 뒤틀린 우월감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디자인 너네, 유전자 디자인 기술 덕에 완벽해진 줄 알지? 착각하지 마. 몸은 어떻게 할 수 있어도, 멘탈은 나처럼 타고나지 않으면 평생 못 가져.
세인이 하담의 멘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담은 경기가 잘 풀리든, 풀리지 않든 늘 평온한 표정이었다. 팬들이 붓다와 하담의 이름을 붙여 ‘붓다담’이란 별명을 지어 줄 정도였다. 세인은 반대로 경기가 잘 안 풀리면 불쾌감이 표정에 다 드러났다. 지난 2047 롤랑가로스 결승에서 한 남성의 야유에 놀라서 서브 실수를 한 후, 세인은 라켓을 코트에 내리찍고, 그 남성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그대로 담겨, 욱하는 세인이란 뜻의 ‘욱세인’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이후 세인은 코치진을 닦달해 최신 멘탈 트레이닝을 두루 접했지만, 효과는 경기 전후 잠깐뿐이었다. 윔블던을 두 달 앞두고 진행된 한 대책 회의에서, 신 소장은 감정 조절용 약물을 써 보는 건 어떤지 조심스레 제안했다.
제가 세인 씨를 맡기 전부터 프로블에서 개발해 온 약물이 있어요. 이름은 ‘익스’. 감정 기복을 줄여서 신체 역량을 기복 없이 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데요,
신 소장이 회의용 특수 글라스의 오른쪽 버튼을 누르자, 회의실 테이블 가운데에 테두리 부분이 두껍게 빛나고 있는 홀로그램 뇌 그림이 나타났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