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리지는 점점 더 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때로 리지는 리지와 귀염둥이의 합성어인 ‘리둥’으로, 때로는 그냥 귀염둥이의 줄임말인 ‘둥이’라고 불린다. 여기서 뱃살이 좀 나오면 ‘둔이’로 불리고, 겨울이 와서 목선이 사라질 정도로 털이 찌면 ‘뚱이’로 불린다. 리지의 이름은 에피소드가 생길 때마다 추가되기도 한다. 참치캔만 먹겠다고 고집을 부릴 땐 ‘고집둥’, 귀찮은 듯 누워서 사냥을 하려 할 땐 누워서 하는 방송에서 따온 ‘눕방둥’, 얌전히 있다가 갑자기 할퀼 땐 ‘깡패둥’으로 불리니까. 원래 고양이 이름은 하나로만 반복해서 불러야 고양이가 그것이 자기 이름이란 걸 확실히 안다지만, 다행히 리지는 이 다양한 이름에 웬만해선 반응을 잘해주고 있다.
이름이 많아지는 이유를 생각해 보니 김박과 내가 계속 같은 이름으로 리지를 부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해서라는 결론이 났다. 리지를 알수록 더 아끼고 사랑하게 되고, 새로 발견한 특징으로 계속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싶게 되기 때문이다. 한 존재를 사랑하면 마음속에서 사전이 무한히 자라나는 것 같다.
이젠 리지에게서 처음엔 못 봤던 모습들을 발견하는 빈도도 늘었다. 얼마 전엔 리지가 츄르를 먹고 기분이 좋아 보이면 마치 스타카토를 연주하느라 건반 위로 통 통 튀어 오르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 같이 리지가 발을 총 총 구른다는 걸 알게 됐다(리지가 기분 좋게 총총총 뛰면 내 마음도 총총총 뛰어오른다). 리지가 발을 그루밍하는 모습은 마치 하얀 미니 솜사탕을 먹는 것처럼 보이며, 리지가 내 엄지손톱만 한 자기 혀로 젤리 같은 자기 코를 날름 핥을 때 매우 귀엽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귀여운 리지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자주 쭈그려 앉는다. 일어서도 30cm가 채 안되고, 누우면 땅에서 10cm도 안 되는 이 존재와 눈을 마주치려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불편함을 감수하거나, 리지와 관련된 불안을 마주하거나, 리지가 누리는 행복을 함께 느끼면서 내가 누리고 싶은 삶에 대해 답을 찾게 된 것 같다.
리지를 만난 후 꼭 이루고 싶은 미래의 한 장면이 생겼다. 김박과 나 모두 각자의 아름다운 작업실을 꾸린 좋은 집에서 리지의 눈빛을 받으며 각자의 작업을 하는 것. 난 무드등의 주홍 불빛이 방안을 가득 메운 작업실에서 눈밭같이 펼쳐진 흰 종이 위에 검은 부츠가 한 발 한 발 나아가듯이 타박타박 글을 썼다 지웠다 하고 싶다. 스피커에서는 가사 없는 나른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리지는 내 뒤에서 조용히 그루밍을 하고 있다면 좋겠다. 나는 이 작업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한발 한발 나아가리라.
이제 귀갓길 현관문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 기분이 조금 더 들뜬다. 머릿속에 마중 나왔을 리지의 얼굴이 까만 숫자판 위의 하얀 글자들만큼 선명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앞 방묘문의 왼쪽 구석에 어김없이 리지의 얼굴이 보인다. 요즘 리지는 우리와 떨어져 있는 시간에 비례해 더 격한 반가움을 보여준다. 평소와 같은 퇴근길이면 “어, 왔어?” 정도로 덤덤하게 김박이나 내 다리에 뺨을 스윽 비벼 자신의 체취를 묻히는 ‘러빙’을 한다. 집을 하루 정도 비웠을 땐 “냐아~(오랜만이네에!)” 하며 무릎에 정신없이 머리 박치기를 하는 ‘번팅’을 한다. 2박 이상이면? 리지는 우리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호통치듯 “냐하아아앗(대체 어딜 갔다 이제 와!)!”하고 날카롭고 길게 울곤 방묘문 앞에 발라당 드러눕는다. 그럼 우린 방묘문 모서리가 리지를 찌르지 않도록 방묘문을 천천히 연 뒤, 들어와서 리지를 쓰다듬어준다. 이제 방묘문 주위는 리지의 격한 환영인사에 응답해야 하는 ‘반김 구역’이 되었다.
리지의 가출(?)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묘문은 처음엔 사실 좀 성가셨다. 고양이는 점프를 잘하기 때문에 1m가 넘게 만들어진 흰 창살의 방묘문은 미드에서 보던 교도소 감옥문 같았기 때문이다. 인테리어를 해치는 1등 주범이랄까. 집을 드나들기도 성가셨다. 방묘문을 열고 현관문을 열어야 집에서 나갈 수 있고, 반대로 현관문을 열고 방묘문을 열어야만 집에 들어올 수 있으니까. 택배박스를 안으로 들여놓을 때나, 컬리박스 혹은 쿠팡 프레시백을 밖에 내어놓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젠 안다. 우리는 방묘문으로 인해 분명히 어떤 편리함은 잃었지만, 어떤 수치의 온도로도 표현할 수 없는 다정한 반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이러한 잃고 얻음은 이 밖에도 많다. 제일 뷰가 좋은 자리를 캣타워 자리로 내주면서 창문 뷰는 가려졌지만, 창문을 보는 고양이뷰가 생겼으니까. 리지가 털을 뿜고 다니는 탓에 돌돌이와 브러시를 갖고 리지를 따라다니게 되었지만, 겨울에 미간을 찌푸리게 할 만큼 귀여운 털 찐 고양이도 매일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리지 덕에 미지근한 사랑을 받는 기분을 알게 된 건 무엇보다 큰 기쁨이다. 리지는 내 책상 뒤 캣소파에서 자다가 내가 일어나면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기지개를 쭉 켜면서 함께 거실로 나가준다. 내가 침대에 누우면 조막만 한 얼굴을 문틈으로 내밀면서 놀자고 꼬시거나, 김박과 저녁식사를 준비하면 캣타워 꼭대기에서 조리과정을 가만히 지켜봐 준다. 늘 미지근한 온도로 곁에 있어준달까.
명쾌함을 좋아하는 난 처음엔 이 미지근함을 대하기 어려워했다. 자주 허둥댔다. 달려와서 열렬한 사랑을 표현하면 꽉 안아주고, 하악질을 하며 차갑게 식으면 사과하면 될 텐데 이 미지근함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헷갈렸다. 하지만 미지근한 사랑을 자주 받자 난 미지근한 사랑을 주는 법을 터득해 갔다. 이제는 리지를 열 번 정도 쓰다듬은 다음엔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안다. 너무 치근덕대면 리지가 “그만!”이라고 말하는 듯이 “냐아아오!” 하고 호통을 치니까. 사랑의 온도가 갑자기 너무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건 집사인 나의 의무다. 리지는 이렇게 내게 존재마다 원하는 사랑의 온도는 다 다르단 걸 깨우쳐주었다.
한때는 리지를 보다가 어렸을 때 나를 스쳐간 반려견 흰둥이, 재롱이가 생각나 많이 반성했다. 그 당시에 나는 그 존재들을 ‘애완동물’로서 바라보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은 채 예뻐만 했다. 돌이켜보니 똥을 치운다거나, 청소를 하는 등 책임의 영역에 있는 일은 거의 부모님이 다 하셨다. 특히 엄마가. 김박과 함께 리지의 전담 집사가 되고서야 난 반려동물과 같이 산다는 건 귀여움 뿐 아니라 컨디션도 끊임없이 살펴보고, 건강을 지켜주기 위해 큰 책임을 지는 일이란 걸 알게 되었다. 랜선 집사일 땐 이불에 폭 파묻힌 까무러치게 귀여운 고양이나 집사에게 솜방망이를 날리는 짓궂은 고양이를 보며 육묘 판타지에 푹 빠져있었는데, 실제 집사가 되어보니 육묘는 고양이의 그러한 귀여움과 짓궂음을 탈 없이 유지하기 위한 치열한 걱정의 현장이었다.
회사 창립기념일 40주년 때 받은 아이패드로 리지 인스타툰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는 더 치열한 걱정, 자기반성, 자기 성찰을 하게 되었다. 리지의 특정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왜 그것이 인상 깊었는지, 왜 그것이 유난히 마음을 쓰게 하였는지를 곰곰이 따져 보다 보면 고민의 종착지는 언제나 나였으니까. 고양이의 세계를 더 깊이 알게 하고, 나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하는 리지. 꼭 코 쪽을 하려고 다가가는 타이밍에 입을 쫙 벌리고 참치향 입냄새가 섞인 하품을 하는 이 존재를 난 앞으로도 많이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