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져나올 구멍

예상치 못한 자리에 선 당신에게

by 유리의아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빠져나올 구멍이 있다는 건 행복한 거라고.

살다 보면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같은 일을 수년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회의감이라는 안갯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슬럼프라는 이름의 늪은 생각보다 끈적이고, 헤어 나오기 어렵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가라앉는 것만 같은 그 순간들을 우리는 누구나 경험한다.

더 당혹스러운 건, 내가 분명히 선택하고 결정했던 길인데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할 때다. 이게 내가 원했던 모습이었나. 이곳이 내가 가려던 곳이었나. 질문들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참 묘하다. 마치 스케치보드 위에 앞으로 나아갈 한 가지 획만 그려놓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학교 전공과목처럼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교양과목처럼 생각지도 못한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가 그은 한 줄의 직선은 어느새 곡선이 되고,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꺾이기도 한다.

그렇게 내 의도와는 다른 어딘가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그곳을 빠져나올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현실에 안주한다. 서서히 우울증을 앓으며 그저 하루하루를 견딘다. 또 어떤 이는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수년간 만들어온 거대한 울타리를 깨닫는다. 쌓아 올린 것들이 많을수록, 그 무게는 더 묵직하다. 결국 많은 이들이 수긍하고 안주하기로 한다. 반면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도 100세 인생에 있어서 첫 도전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거침없는 도전에 나선다.

어떤 선택이 옳고 그른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빠져나올 구멍은 늘 준비해두어야 한다는 것.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고민의 순간은 반드시 다가온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작은 틈이다. 숨 쉴 수 있는 여유,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

그 구멍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더 가볍게 오늘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빠져나올 구멍이 있다는 건, 결국 희망이 있다는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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