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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센시티브 Sep 13. 2022

정상까지


 동네 산의 정상을 오르기까지 일 년 가까이가 걸렸다. 정상을 오르는 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저 산 공기가 좋아서, 나무와 꽃과 자연을 마주하는 게 좋아서 산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둘레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어디가 끝인지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걷다가 힘이 들면 초콜릿을 베어 물고 당을 충전했다. 조금 더 가다 힘이 들면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그러다 남아있는 체력을 아껴두고 왔던 길을 내려왔다. 그 시간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리곤 옆 동네에 있는 산도 가기 시작했다. 엄마와 함께 갔는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산이라 낯설었다. 그래도 함께 가는 거라 혼자 갔을 때보다 편안함이 들었다. 


 산에는 절이 있었는데 절까지 가는 계단이 꽤 길었다. 첫 목표는 절이 자리하고 있는 거리까지였다. 하지만 그 절까지 이르는 계단조차 버거웠다. 헉헉 대며 차오르는 숨을 고르고 못가겠다며 다시 집으로 오곤 했다. 그렇게 몇 번의 시간을 보냈다. 어느 정도 길에 익숙해지고 좀 더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둘레 길을 돌았다. 꽤 짧은 코스의 경로가 있었기 때문에 둘레 길을 걷고 나면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카페가 자리해 있어서 차를 마시며 주변경관을 감상하면 더할 나위 없었다. 무릉도원이었다.

 그때까지도 정상에 대한 목표는 없었다. 자연을 감상하며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체력을 확인 하는 것. 그게 나의 작은 행복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상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 언젠가는 꼭 가리라. 정상을 오르기 위한 꿈을 갖고 매일 잠이 들었다. 빨리 주말이 오길 기다렸다. 어느 날 이모부께서 우리 집에 오실 일이 있었는데 엄마는 내가 정상까지 가보는 게 소원이라며 같이 가자고 말하였다. 이모부는 매일 아침 산 정상까지 오르시는 분이어서 같이 가면 왠지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모부는 부탁을 선뜻 들어주셨고 우리는 과일과 떡, 오이, 막걸리, 김치 등을 급하게 준비하고 산길을 나섰다.    


 등산로 입구를 지나자 계단이 나왔다. 어디까지가 계단인지 모르겠다. 일단 나는 계단 오르는 건 자신 있었다. 바위를 오르는 것보다 심적으론 나았다. 중간 중간 물을 마시고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엄마는 계단 오르는 걸 힘들어했다. 이모부는 마치 여행가이드처럼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소름끼치는 건 이모부는 오전에 이미 정상까지 갔다 왔다는 거다. 하루에 두 번 산을 타다니. 이게 매일 산에 오르는 자의 에너지인가? 그렇다면 난 더 산을 오르는 자가 되고 싶었다. 건강한 몸을 갈구하는 나의 마음은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정상까지 오르기 전 중간지점인 팔각정까지 오르자 바람을 쐴 수 있었다. 사진도 찍고 잠시 쉬었다가 경치를 감상했다. 정상까진 아니더라도 매일 이곳까지만 오르자 난 다짐했다. 밀폐용기에 담아온 과일을 먹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기진맥진하며 누워서 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모부는 쉬었으니 빨리 가자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에서 이십분 정도만 가면 정상이라 했다. 생각보다 쉬운 생각이 들었다. 산길을 잘 아는 이모부와 함께 와서 그런 것 같았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꽤 많이 오르는데 점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오르면 오를수록 정상에 대한 집념은 더 강해졌다. 계단이 이어지고 약간 비탈진 오르막길도 있었지만 괜찮았다. 좀만 있으면 마주하게 될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생각하자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르막길과 계단을 반복하고 나서야 정상을 마주했다.


 "자 이제 다 왔다.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정상에서 마주한 건 아이스크림과 생수를 파는 아저씨였다. 이곳에서 먹는 아이스크림은 동네슈퍼에서 먹고 싶을 때 편하게 먹는 아이스크림과 다른 맛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서둘러 아이스크림을 사고 내려갈 때 비상용으로 먹을 물이 필요해서 생수도 한 병 샀다.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자마자 행복감에 젖었다. 아이스크림 하나만으로 부족한 당이 충전된 것 같았다. 

 정상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줄 서 있었다. 꽤 오랜 시간 기다려서 사진을 찍었다. 정상을 표기하는 돌 옆에서 이리저리 포즈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었다. 이모부는 산에서 잘 나오는 포즈까지도 알려주었다. 이런 게 짬이었다. 정상까지 오면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래 기다려 온 목표를 이뤄서인지 더 값지게 느껴졌다. 정상까지 오기 위해 산과 친해져야 했던 시간들, 조금씩 축적한 체력, 섣부른 마음보다는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야 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이렇게 멋진 자연경관을 볼 수 있다니. 정상에서 보는 경치에 감탄하며 한동안 말을 이룰 수 없었다. 너무 오래보면 닳을 것 같아 아껴두고 싶었다. 정상까지 오르자 허기가 졌다. 주변 먹을 곳을 찾아 바리바리 싸온 음식들을 풀고 오이를 아삭아삭 씹어 먹으며 막걸리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열무김치를 곁들였다. 담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열무김치의 신선한 맛이 혀끝에서 감돌았다.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내려갈 채비를 하였다. 나는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더 힘들었다. 올라오는 데 에너지를 많이 써서 그런지 내려가는 건 힘이 빠졌다. 발도 부어서 그런지 신발이 작게 느껴졌다. 힘이 쭉 빠진 채 어렵사리 내려왔다. 엄마는 내려가는 게 더 신난다며 앞서 나갔다. 계단 오르는 건 힘들어하시더니 내려가는 건 누구보다 빨랐다. 등산하는 스타일도 이렇게 다 다르구나. 라고 생각하며 안전하게 내려온 걸 감사했다.

 내려와서도 한참동안을 내가 정상에 가다니. 말도 안 된다며 놀란 나머지 현실을 부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상에 갈 수 있었던 건 이모부 덕분이었다고 감사인사를 전했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는 중요한 것 같다. 정상을 겁내던 내가 자신감을 가지며 아무렇지 않게 갈 수 있었던 건 나를 걱정하며 염려하는 게 아닌 그저 묵묵히 앞길을 나서며 길을 안내한 이모부가 있어서 안전히 따라갈 수 있지 않았을까?   


 내 삶의 안내자는 누구일까 생각해 본다. 갓난아기일 때, 웅얼웅얼 막 말을 배우려 할 때, 기저귀를 갈아주며, 밥을 떠먹여주며 보살펴 준 부모님이 나의 우주였고 나의 안내자였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매 해 바뀌는 담임선생님이, 대학생 때는 동기들과 밥 잘 사주는 선배들이, 사회인이 되었을 때는 직장 선배의 가르침이, 끈임 없이 삶을 이어 나가는 과정 중에 먼저 앞서고 지지해주는 안내자가, 함께 걷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의 안내자였음을 자각한다. 꾸준한 연습을 통해 정상에 당도했을 때의 기분을, 묵묵히 내 옆을 스쳐갔던 삶의 안내자들을 회상하며 따사로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결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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