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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 Apr 28. 2017

양성평등을 꿈꾸는 나, 이율배반적인가?

영화 <해피 이벤트>를 보고(레미 베잔송 감독,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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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사랑했고 행복했다. 세상에 우리 둘 뿐인 듯...

웃는 것만 봐도 심장이 벌렁거렸고 눈빛만 봐도...

자유로웠고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날 그가 말했다. “우리 아기를 갖고 싶어.”

욕망과 사랑에 빠진 난 정신 나간 대답을 했다.

 - <해피 이벤트> 中 바바라


 


 

DVD 대여점에서 손님과 점원으로 만난 바바라(루이즈 보르고앙)와 니콜라스(피오 마르마이), 그들은 말 대신 영화 제목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상대의 마음을 밀고 당긴다. 조금씩 가까워진 둘은 점점 경계가 없는 하나가 되었다가 호기롭게 셋이 되기로 결심한다. 행복으로 가득할 것만 같은 임신 9개월의 시작에 바바라는 화장실에서 변기를 잡고 있다. 다름 아닌 입덧 때문이다. 초음파를 통해 아이의 심장소리를 듣고서는 우주 탄생의 신비를 경험한 듯 감격하기도 하고, 점점 불러오는 배를 보면서는 자기 안에 외계인이 사는 것 같다며 두려워하기도 한다. 달콤하게 영원한 사랑을 속삭였던 남편이 널 뛰는 아내의 감정에 공감은커녕 이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행동에 좌절하기도 한다.  

레미 베잔송 감독의 영화 <해피 이벤트>(2013)는 보통의 부부가 출산을 기준으로 전과 후 1년 사이에 경험하는 대부분의 사건과 고민, 갈등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육아를 책으로 익히려 애쓰던 시절, <프랑스 아이처럼>(파멜라 드러키맨, 2013)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생후 3개월이 되면 밤새 한 번도 깨지 않고 자며, 어른의 관심을 얻으려 떼쓰는 일도 없다는 프랑스 아이를, 모유가 좋다는 건 알지만 엄마 인생이 더 소중하다며 분유를 먹이고, 소리치지 않고도 권위를 확립한다는 프랑스 부부를, 그리고 그들의 양육 현실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니 육아 현실의 냉혹함은 한국과 프랑스, 나와 너의 구분 없이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묘한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끼며 남편인 니콜라스의 엉뚱한 행동에 합리적인(?) 변명까지 시도했다. 그러다 바바라의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지켜보던 나는 어느새 그녀와 함께 남편 니콜라스에게 분노하기에 이른다. 이 정도면 백년해로를 위해 영화를 결재하고 아내는 남편의 손을, 남편은 아내의 손을 맞잡고 TV 앞에서 100분을 견디는 수고는 충분히 의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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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출산 과정에서 드러나는 남편의 용기에 놀라다.

니콜라스는 출산을 준비하며 바바라와 함께 아기 용품을 보러 다닌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바바라는 거실을 휘익 둘러보고 아이와 함께 셋이 살기에는 좁지 않냐고 말한다. 니콜라스는 기다렸다는 듯 면접을 보았다고 한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접고 취직을 하겠다는 뜻이다. 이 얼마나 듬직한 남편이자 아빠의 모습인가?

바바라가 분만실에 들어갔을 때, 뒤따르는 그는 위생복을 입으면서 신발에 껴야 할 것을 머리에 쓴다. (아마도 아내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겠지.) 진통을 시작한 아내가 힘들어하며 ”가만 내버려둬” 하자 “나가 있을게.”라고 답하고, 건조한 분만실에서 얼굴에 열이 오르는 임산부를 위해 의사가 건네준 미스트를 자신의 얼굴에 뿌리는 니콜라스. (순진한 것인지 고수의 한 수인지, 눈치가 없어서인지 혼란스럽다.) 그의 용감함이 차고 넘치는 장면은 또 있다. 바로 아내가 진통으로 생과 사의 고통을 오가는 순간에 출산 준비 수업에 결석한 것을 알고는 “어디 갔었어? 어디 갔었냐고?” 하며 다그치는 것이다. 아내와 함께 수업에 참석했다면 애초부터 질문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터인데 말이다.  


 

둘째, 육아 환경에도 굳건히 자신을 지켜온 남편에 당황하다.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바바라는 쉽게 병실을 떠나지 못한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에겐 두려워할 여유도, 눈물을 흘릴 시간도 없다. 잠깐 아이가 잠든 사이 음식을 앞에 두고서, 세탁기를 뒤에 두고서, 노트북을 켜두고서 졸고 졸고 또 조는 일상을 보낸다. 식탁에서 졸고 있는 바바라를 본 니콜라스는 “이제 밤에 잘 자니 다행이야.”라고 한다. 어이없는 표정의 바바라는 “밤에 잘 자? 밤에 잘 자는 건 우리 딸이 아닌데?” 하며 일갈하고, 천진하게 빵에 쨈을 바르던 니콜라스는 “티셔츠가 하나 뿐이야?”라고 묻는다. 게다가 일요일 아침 8시에 벨이 울리자, 25번이나 전화해서 겨우 예약한 냉장고 수리원이라는 바바라의 설명에도 “일요일 아침에? 내 생각은 안 해?” 하며 소리친다. 임신과 출산으로 모든 것이 변한 아내를 보면서도 결혼 전, 출산 전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초지일관 지켜내는 뚝심 있는 남편이다.  


 

셋째, 니콜라스가 꺼낸 히든카드에 고개를 숙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충을 쏟아내는 아내를 위해 믿음직한 남편은 “걱정 마, 내가 해결해 줄게.” 하며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선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가 말한 ’나’는 ‘자신’이 아니라 ‘나의 엄마’ 즉 시어머니 찬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시어머니의 방문에 인터폰으로 현관문을 열고서 급격히 식어가는 바바라의 얼굴은 앞으로의 모든 것을 암시했다. 그 첫날 모유 수유를 원하는 바바라에게 시어머니는 “원하기만 하면 뭐 하니? 제대로 못 하잖아.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난 니콜라스가 5살 때까지 젖을 먹었어. 그러니 나만 믿어. 넌 엄마 젖 먹고 자랐니? “ 하며 도움으로 시작해 훈계로 마무리한다. 설명이 필요 없는 고부간의 마찰에 니콜라스는 ”도와주러 온 사람에게 왜 시비야? 그럼 장모님 모셔와 봐. 얼마나 버티나 보게. “ 라며 아내에게 비수를 꽂는다.  


 

영화를 보면 등장인물의 행동과 나의 경험이 겹치거나 연상되는 부분이 있다. 특히 나와 니콜라스는 “남편”이란 이름 외에 별도의 수식어가 필요 없을 만큼 닮았다. 동지 된 의무로서 순간순간 나의 이야기로 지원사격을 하고 싶다가도 매번 목구멍을 넘지 못하고 그 앞에서 탁 하고 막혔다. 니콜라스와 바바라, 이 부부에 대한 짙은 공감에서 생겨난 민망함과 미안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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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으로서, 남편으로서 책임보다 권리, 기득권에 안주하던 내가 주제넘게 양성평등을 생각해 본다. 물론 페미니즘을 논하거나 그 찬반을 주장할 정도의 지식은 없다. 단지, 출산과 육아의 과정에 홀로 선 바바라가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에 눌려 본래 자신의 이름을 점차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어머니와 아내가 그리고 딸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고, 그래서 짊어진 또 짊어질 삶의 무게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바바라는 육아와 가사의 무한 반복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시간을 나누고 쪼개서 자신의 논문을 완성했다. 이에 지도교수는 “우수 학생이고 실력을 인정했었어. 그런데 자네가 제출한 논문은 정보의 자투리에 불과해. 의도도 모르겠고 철학과는 거리가 멀어.” 하며, 조교수 자리는 다른 이에게 갔다는 소식을 덤으로 얹어주었다. 여성이기에 논문이 통과되지 못하고 조교수 임용에 탈락한 것은 아니지만, 엄마이자 아내였기에 아니 그 역할에 자신을 온전히 빠뜨려야 했기에 지금껏 걸어온 자신만의 영역에서 멀어졌다는 냉정한 평가를 받은 것임은 분명하다. 두 아이를 낳으며 휴직과 복직을 번갈아 하던 아내가 동기들과 몇몇 후배들마저 먼저 보낸 후에야 비로소 승진의 기회를 엿보던 것이 떠올랐다. 경력단절녀가 되지 않고 돌아갈 직장이 있다는 것에 만족했던 나는 그동안 아내가 직장 상사와 동료에게 어떠한 평가를 받았을지, 또 어떤 일을 감수해야 했을지 이제야 짐작해본다.


 

얼마 전 어머니께서 공공기관에서 추진하는 실버 바리스타 일자리에 응모하셨다. 교육을 받고 필기시험을 치른 후 면접까지 보셨단다. “커피를 좋아하느냐?”는 면접관의 물음에 좋아하진 않지만 합격하면 노력하겠다고 하신 어머니는 돌아오는 길에 그냥 좋아한다고 했어야 하는데, 하며 후회하셨단다. 생전 처음으로 집을 벗어나 자신의 이름이 불리며, 당당히 일을 하고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것만 같았기에 그러셨던 모양이다. 요즘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유달리 밝고 경쾌하다. 커피색 유니폼이 마음에 드시는지 사진을 찍어 보내셨다. 예순을 훌쩍 넘긴 연세에 출근하는 기쁨이 이토록 그녀를 생기 넘치게 만들다니, 그동안 답답해서 어찌 사셨을까 미안한 마음이다.  


 

아직 10대에 이르지 못한 딸이 자라 20대가 되고 30대로 살아갈 우리 사회 모습이 궁금해진다. 하늘의 기운을 받은 누군가 이 땅에 나타나 모든 상황을 단번에 해결할 묘수를 찾아내서 남성과 여성, 남편과 아내, 부모와 아이에게 평등과 행복을 선물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딸아이의 아빠로서 양성평등에 기반한 사회로의 진화를 기대하지만, 어머니와 아내의 모습으로 보건대 한 번에 리셋하고 재설치할 수 있는 것의 성질이 아니니 희망만을 말할 수는 없겠다. 생각만으로 답답해지는 사회의 변화는 차치하고 나와 가족이 당면한 현실로 돌아가자.  


 

아내와 남편의 양성평등,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제와 가사, 육아에서 모든 일을 양분하는 것이 평등하게 보이지만, 맞벌이를 하는 우리 부부에겐 일률적으로 양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자 회사의 위치에 따른 출퇴근 시간이 다르고, 근무 환경이 달라 자연스레 육아와 가사가 한쪽으로 치우치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청소와 요리와 같은 일에 개인의 취향과 능력이 다르니 이를 반영하지 못한 분배는 효율적이지도 않다.   

남녀가 부부가 되고 가정을 이루어 행하는 여러 일의 분배는 각 가정의 특성과 상황을 담아 고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수시로 재조정되기 마련이다. 어떤 가정에서는 경제를 엄마가 담당하고, 육아를 아빠가 맡을 수도 있고, 또 다른 가정에서는 경제는 공동으로 분담하되 가사와 육아는 평일과 주말로 구분하거나, 가사와 육아의 하위 항목을 그룹화하여 분담할 수도 있겠다.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돌봄은 엄마가 하고, 놀이하고 견학하고 학습하는 것은 아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때론 타인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해야 할 수도 있고, 요즘 같은 경제난에는 부부 모두 일자리에 더 많은 역량을 집중해야 할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다양한 환경 속에서 부부가 양성평등을 실현한다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일지도 모른다. 누가 어떤 일을 얼마나 하느냐가 아니라 아내와 남편이 평등하게 생각을 나누고 협의하며 공감을 바탕으로 함께 결정해나가는 것, 그래서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 말이다. 니콜라스와 심하게 다툰 후 불 꺼진 주방에 주저앉아 “난 믿고 기댈 남자가 필요하다고!” 하며 홀로 울먹이는 바바라를 기억한다.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언제 어디서나 건강한 어깨를 내어주는 것도 평등을 찾아가는 노하우일 테다.


 

다소 민망한데, 가사와 육아에 참여하는 것이 지금껏 살아온 생활패턴에서 벗어나 나를 더 불편하고 힘겹게 만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내가 아니라 다른 남성을 비교대상으로 삼았던 시절, 이 정도의 육아 참여면 충분하지 하며 나 홀로 만족했다. 그런데 어느 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서 피곤에 지쳐 잠든 아내와 엄마의 팔을 동아줄 마냥 꼭 부여잡은 아이를 보고서, 다음날 함께 식사를 하며 그들이 주고받는 단어에서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는 경험을 하고서 내가 이방인이고 외딴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여전히 섬이지만, 육지와 오가는 돛단배가 쾌속선으로 바뀌었고, 정기 편 외에도 수시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 어색하지 않다. 29kg과 14kg의 녀석들이 한 번에 달려들어 온 몸의 근육이 움찔 놀라기도 하지만, 아빠 품에 들어가려 서로 다투는 모습엔 뿌듯한 미소가 절로 생긴다.  


 

남자가 가사와 육아의 세계로 풍덩하고 뛰어드는 순간, ‘저만치서 바라보던 나의 가족’이 ‘함께 웃고 같이 우는 끈끈한 가족’으로 변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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