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울할 땐 초콜릿

by moonlight
유난히 땀을 많이 흘렸던 지난 여름의 일기입니다.


“아버님. 이번 주까지 빈이 건강검진 결과서 제출해 주세요.”
“앗! 네. 선생님”


만 6세 미만의 영유아는 정부에서 시행하는 영유아 건강검진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4개월부터 66개월까지 7차례에 걸쳐 신체, 행동, 언어 등의 발달상황을 확인하는데, 그 결과지를 어린이집에 제출해야 한다.
아내로부터 병원가기의 고단함을 들은 기억은 없다. 엄마와의 애착이 잘 형성되어서인지 아내만의 뾰족한 묘수가 있는 것인지 그냥 아이의 거부나 투정쯤은 쿨 하게 지나가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린이집을 나온 아이와 맞잡은 나의 손엔 살짝 땀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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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둘째 빈이의 반려질병이 되어버린 기침과 콧물로 병원을 찾았다. 대기실에선 책도 읽고 다른 아이들을 기웃거리던 녀석이 “빈이 들어오세요.”라는 한마디에 그냥 얼음이 되어버렸다. 앗! 이럴 수가.
재촉하듯 아이의 이름이 다시 불리자 나는 더 조급해졌고, 급기야 아이를 들쳐 안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끄억끄억 입을 벌려 소리 내어 우는 통에 목구멍 검사가 금세 끝났다. 눈물과 같이 쏟아내는 콧물 덕에 코 검사를, 외침과 기침의 사이의 울음 덕에 폐 검사까지 순식간에 끝났다.
빈이는 병원을 나와 약국에 도착해서야 겨우 울음을 그쳤다.
의사, 간호사 선생님께 배꼽에 손을 얻고 고개 숙여 인사도 하고, ‘아~’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입을 벌리며 진료를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의 일이 반복될까 계획을 세운다. 우선 D-Day를 목요일로 정한다.”


오늘은 월요일, 하원 후 병원이 있는 상가를 어슬렁거린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의 절반쯤 오르자 빈이가 손을 잡아끈다. 본능적으로 느꼈던 모양이다. 1층으로 내려와 마트에서 젤리와 초콜릿을 매만진다. “씩씩하게 진료 받으면 의사 선생님이 주실 거야.”라며 나는 아이에게 미리 약을 바른다.

화요일. 2층까지 오른다. 탐정놀이 하듯 가게 문과 벽 사이로 몸을 숨기며 소아과에 다가간다. 진료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확인하고 우린 다시 1층 마트로.

수요일 되니 자연스레 2층으로 오른다. 빈이의 밝은 표정에 나는 슬쩍 쨉을 보낸다. “오늘 곰 젤리 받으러 갈까? 주사는 안 맞아. ‘아~’ 하면 초콜릿을 주실 지도 몰라.” 하고 말이다. 일시 정지했던 빈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앗. 이런 행운이!!!

의사 선생님 앞에 앉으려는 순간 녀석의 몸이 단단해진다. 다행히 울음소린 들리지 않는다. “아~” 하는 선생님을 따라 입을 벌린다. 발달상황과 주의사항을 들은 후, 비로소 고개 숙여 빈이의 얼굴을 본다. 뚝뚝. 눈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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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할 때, 부모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완전한 육아》라는 책을 찾았다. 미국 전역의 학교에 배포되는 뉴스레터 Parenting Tips를 발행하는 엘리자베스 팬틀리가 썼는데, 육아 현장에서 발생하는 상황을 200가지로 분류하고 그에 적합한 해결책을 각각 제시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이와 함께 평온하기 병원가기’라는 사례는 없었다. 대신 빈이가 건강에 좋은 채소를 멀리하고 고기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게 생각나, 편식이 심한 아이를 위한 솔루션을 찾아보았다.


아이가 건강하고 신장이나 체중도 정상이라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아요. 부모가 걱정하거나 화를 낼수록 오히려 아이와의 대립만 심해질 뿐입니다. 몇 가지 식사에 대한 규칙을 정하고, 냉정한 태도로 그 규칙을 지키게 하면 효과적입니다.


맞다. 내가 너무 민감했어. 신장과 체중이 특이점에 있지는 않잖아. 너무 예민했어. 괜히 서로 소리만 질렀잖아. 맞아. 맞아. 그런데 ‘규칙을 정하고, 냉정하게 지키라고?’ 이런 나의 반응을 예상한 듯 팬틀리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친절하게 알려준다. 식사와 간식 시간을 정하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게 하는 것.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조금만 식사에 곁들이는 것. ‘이게 오늘 저녁이야. 배가 고프면 먹어. 아니면 식탁에서 물러나.’라는 태도로 일관하라는 것 등이다.

아휴. 시간을 정하고 먹는 것. 이것 어렵다. 수유와 이유식을 지나오며 시간에 맞춰 챙겨주는 것에서 해방된 지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시간을 정하라니. 또 간식 시간은 무어람. 그냥 입이 심심할 때, 아이가 불편해하는 여러 상황이 생겼을 때 모면하기 위한 딱 좋은 것이 간식, 군것질인데, 여기에 시간을 정하라니. 또 ‘이게 오늘 저녁이야. 배가 고프면 먹고 아니면 식탁에서 물러나.’라는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하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천성인지 학습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쿨 하지 못하게 끼니마다 밥을 먹으라고 애태우는 부모다.


한 번이야 식사를 거를 수도 있겠지만, 손 가시가 생기고 피부가 거칠어지며 쿨럭이는 기침을 하면 곧장 평소 밥을 챙기지 않아서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아이를 보기만 했을 땐 배고프면 먹겠지 했지만, 주양육자가 되어 가까이서 보고 아이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의 책임으로 돌아오는 것 같은 현실에서는 빨리 먹이고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은데 말이다. 전문가에게도 나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구나, 하니 조금 쓸쓸하다.

+
어린이집에 가기 전 병원을 들러야 했던 적이 생겼다. 등원을 준비하며 상황을 설명했는데, 갑자기 외출을 거부한다. 자긴 집에서 좀 더 놀아야겠다나.
아휴~ 한 숨 쉬며 잠시 진정하는 사이, 갑자기 겨울장갑과 목도리가 가득한 어린이용 캐리어를 끌고 신을 신는다. 한여름인데 말이다. 말릴 겨를 없이 신을 신고 따라나섰다. ‘어찌 용케도 병원 가는 길을 기억해낸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빈이는 상가 옆 놀이터로 방향을 돌린다. 미끄러지듯 미끄럼틀로 다가가 팔짱을 끼고 돌아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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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하게 말하면 뻥 뚫린 공간에서 소리 높여 울 것이고, 떨어지는 눈물을 보면 난 분명 달콤한 유혹을 시도하겠지. 받아들이면 다행이지만, 이마저도 안 통한다면. 한 두 번은 통해도 결국 더 많은 요구에 언젠가는 부딪히겠지.

어찌할까. 갈팡질팡. 우왕좌왕.

이런 나의 마음과 행동을 보듬을 줄 근거 충만하고 논리 정연한 이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단호하고 명확한 부모의 태도를 갖게 하는 캡슐 약이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어쩌면 이런 부모의 계략을 한 번에 무력화할 또 다른 캡슐이 나타날지도 몰라.

viktor-forgacs-140589.jpg ⓒ Viktor forgacs 출처 Unsplash

결국 나는 병원행을 멈추고 가방에서 비상약을 꺼낸다. 초콜릿이다.
철학자 발타자르 토마스는 저서 《우울한 땐 니체》에서 “풍요로운 삶은 흠집 없는 안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불행을 직면하는 방식에 있다.”라고 했다. 그래, 실수 없는 흠집 없는 삶이 있겠는가? 다만 지금은 워낙 급박하니 어떻게 극복할지는 잠시 미뤄둔다. 극도로 우울한 빈이와 나, 우리 둘은 일단 초콜릿을 먹는다. 하나 먹고 두 개 먹고. 얼굴에 미소가 퍼질 때까지 먹는다.

역시 우울할 때 초콜릿이 최고다!
근데 우린 병원에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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