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연필

어떻게 사유하고 무엇을 기록하고 싶은가

by moon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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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학교에서 선물로 연필 받았어!"

초등학교 6학년인 첫째 아이가 퇴근한 나에게 말을 건넨다. 책상 위에 쌓인 연필 더미를 생각하고선 졸업반 학생에게 연필 선물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며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색연필을 주로 쓰는 둘째는 부러움의 눈빛을 보냈고, 아내는 "중학교 때부터 샤프만 사용했어."라며 둘째에게 양도하기를 에둘러 권했다. 그러자 대뜸 첫째가 "아빤 몽당연필 쓰잖아."라고 했다.

맞다. 나에겐 첫째에게 기증받은 작은 필통에 작달막한 연필 하나가 있다. 물론 펜도 있고 만년필도 있고 형광펜도 있지만 몽당연필이 하나 있다.



예전보다 빈도는 줄었지만 종종 아침 일기를 적을 때면 몽당연필을 사용한다. 너무 짧아서 잡기에 불편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꽉 쥐는 밀착감이 좋다.

오늘처럼 쉽사리 일기를 적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기다란 연필이 몽당해지기까지 써 내려간 사연을 생각한다.

제 심지를 꾹꾹 눌러 내 삶의 기록을 채웠다는 것을, 그래서 제 몸이 훌쩍 줄어들었다는 것을 아는지.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던 이야기도, 즐겁고 반갑고 고맙고 사랑하던 이야기도 묵묵히 받아낸 녀석이 고맙다.

연필을 사용하는 나의 마음 한편에는 지우개를 통해 초기 상태로 되돌리려는 은밀한 계획이 있다. 하지만 한 움큼 줄어든 연필을 보면 무심코 손의 움직임에 맡겨 글을 쓸 수 없다. 그래서일까. 녀석은 언젠가부터 그려지는 단 하나의 선도 헛되어선 안된다는 듯 내 손에서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앞으로 얼마 동안 어떤 이야기로 나의 노트를 채워갈지 가늠할 수 없지만, 깎이고 쓰여 사라진 길이만큼 나에게 침투하여 결국 나의 삶이 된 몽당연필과 함께라면 좀 더 담백하게 사유하고 또 담대하게 기록할 것 같다.



헤픈 말을 버리고
진실만 표현하며
너처럼 묵묵히 살고 싶다
묵묵히 아프고 싶다

이해인 님의 <몽당연필> 中



노트 위엔 글로, 마음 속엔 감사함으로
오늘을 새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