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팀의 편지
대표님께.
최근 몇 개월간, 자회사 리더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장 자주 들은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율’입니다.
“저희가 자율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했습니다.” “자율권을 주신 걸로 알고, 저희 선에서 진행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마음 한켠은 늘 불안해집니다.
왜일까요. 그 ‘자율’이라는 말이 점점 기준 없는 단어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대표님, 자율은 좋은 단어입니다.
믿고 맡긴다는 뜻이고,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태도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자율이라는 말이 울타리 없이 혼자 던져질 때입니다.
경계가 없는 자율은 자칫 무질서가 되고, 책임의 선이 흐려진 자율은 결국 회피로 이어집니다.
얼마 전 있었던 일입니다.
한 자회사에서 신규 프로젝트를 자율적으로 기획하고, 예산을 집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몇 달 후, 성과가 좋지 않아 종료되었고, 그 과정에서 회사 전체에 적지 않은 비용 손실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본사에 관련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때 대표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이건 누가 결정한 거야? 왜 이렇게 돈을 써버렸지?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건데?”
담당 임원은 말했습니다. “대표님과 방향 논의 후, 자율권을 준다고 하셔서 진행한 겁니다.”
그 상황을 지켜보며, 저희 인사팀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자율’이라는 말이 서로 다르게 해석되고 있었구나.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없이도 해도 되는 것’으로, 누군가는 ‘실패해도 책임을 안 져도 되는 것’으로, 또 누군가는 ‘일단 해보라는 격려’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어떤 경계도, 기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율은 방임이 아닙니다.
자율이 작동하려면 반드시 구조가 필요합니다.
이 구조는 통제가 아니라, 자율의 범위를 명확히 그려주는 신뢰의 장치입니다.
팀장이나 임원이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으려면, 그 판단의 맥락과 기대, 보고의 기준, 예산의 한도, 실패했을 때의 복구 경로까지 함께 설계되어야 합니다.
그 울타리가 있을 때, 사람들은 안심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경계가 없을 때, 사람들은 늘 불안합니다.
“이건 내가 판단해도 되는 걸까?” “혹시 나중에 문제 되면 혼자 감당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리고 그 불안은 다시 본사로 되돌아옵니다.
애초에 맡겼던 일인데, 도중에 다 들고 와서 승인받으려 하고, 책임을 명확히 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결과를 남깁니다.
결국 본사는 다시 말합니다. “자율권 줬더니 왜 다 들고 오지?”
인사팀은 이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서 봅니다.
그래서 감히 제안드립니다.
앞으로 자율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그 자율의 경계를 함께 설명해 주세요.
“이 프로젝트는 이 범위 안에서는 네가 주도해도 좋아. 단, 이 수준의 예산을 넘기면 공유해줘.”
“이 정도의 리스크는 감수 가능하지만, 이 선을 넘는다면 함께 판단하자.”
이처럼 자율은 ‘맡긴다’는 선언이 아니라, ‘여기까지는 네가 판단할 수 있다’는 울타리를 함께 세워주는 일입니다.
그 울타리는, 결국 리더가 혼자 고민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표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율을 신뢰의 표현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신뢰는 구조와 함께할 때 가장 단단해집니다.
기준 없이 자유롭게 둔다고 해서 자율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지도 위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자율은 작동합니다.
그 울타리를 함께 그려야 하는 이유, 인사팀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인사팀에서 드립니다.
❤️ 사람 중심의 조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인사담당자 입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사이트를 글로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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