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으로 충성한 D+ 56
부모님께.
잘 지내고 계시죠? 저는 요즘 상무대에서 나름대로 ‘사람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대기병 신분으로 명찰도 없이 하루 종일 각 잡고 앉아만 있었거든요. 전화도 못 하고, PX도 못 가고, 세탁기도 이용할 수 없는 그 생활이 꽤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훈련소 때와 비슷하게 주차가 표시된 명찰을 달게 되었습니다.
그 조그만 표시 하나가 생활을 완전히 바꿔놨어요. PX도 이용할 수 있고, 전화도 할 수 있고, 세탁기도 마음대로 돌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걸 '자유이용권'이라고 부르는데, 그 전까진 사람도 아니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입니다. 농담 같지만 군대에서는 진짜 그렇더라고요. 작은 변화 하나가 일상 전체를 바꿔놓기도 합니다.
오늘은 국군의 날이라 오침도 하고, 취식물도 먹고, 밀린 빨래도 돌렸습니다. 하루만큼은 정말 여유롭고 편안했어요. 상무대가 '군생활의 파라다이스'라 불린다던데, 오늘은 진짜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 모두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죠?
요즘 매일 저녁 9시부터 15분 정도간 뉴스를 보는데, 아버지가 다니시는 통신회사 관련 소식이 나오더라고요. 대기업도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뉴스를 보며 걱정이 되긴 했습니다.
형은 지금 말년휴가 나와서 신나게 놀고 있겠죠? 핸드폰도 새로 샀다던데요.
그리고 어머니는 요즘도 종종 고스톱 게임 하시나요? 컴퓨터 앞에 앉아 집중하시던 모습이 문득 떠올라 괜히 웃음이 났습니다.
요즘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일교차도 크니까 모두 감기 조심하시고, 식사도 잘 챙기세요. 그리고 꼭 말씀드릴 게 있어요. 편지에 절대 돈 넣어서 보내지 마세요. 월급도 나오고, 가져온 돈도 충분히 있어서 부족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여기서는 편지를 검열하기 때문에, 돈이 발견되면 동기들까지 얼차려를 받게 됩니다.
이 편지가 도착할 무렵이면 형은 제대했겠네요. 다시 집안이 시끌시끌해졌겠죠. 저는 여기서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 마시고, 집에서는 예전처럼 웃으며 지내주세요.
2003년 10월 1일
아들, 이준서 드림
✒️ 기억의 조각
작은 명찰 하나가
닫혀 있던 내 일상에
전화, 세탁기, PX..
그리고 ‘사람 같은 하루’를 열어주었다.
❤️ 스물한 살, 그 낯설고도 선명했던 시간을
매주 글로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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