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전차보다 더 무거운, 형의 조언

내 이름으로 충성한 D+59

by 퇴근 후 작가

상무대 기계화학교에 와서 후반기 교육을 받던 그 시기, 매일같이 반복되는 전차 이론 수업에 몸도 마음도 조금씩 무뎌져가던 때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동으로 책상 앞으로 향했고, 강의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훈련소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실습은커녕 이론, 또 이론. 머릿속은 전차의 구조와 정비 절차로 가득 찼고, 하루하루가 지루함과 피로 속에서 쌓여갔다.

그날도 별다를 것 없는 하루의 끝이었는데, 내무실에 들어서자 조교가 봉투 하나를 건넸다. 낯익은 글씨. 형이었다.

형이 자주 보내준 편지는 반복되는 군생활 속에서 내게 큰 위안이자 숨 쉴 틈 같은 존재였다.


준서야.

잘 지내고 있냐?
지금 장성 상무대 기계화학교에 있다고 들었다. 훈련소보다는 조금은 여유가 생겼을 것 같고, 새로운 걸 배우느라 정신없겠지만 몸은 예전보단 한결 나아졌을 거라 믿는다.

생각해보니까 내 친구 중에 전차 정비병이 하나 있었잖아. 마침 어제 10박 11일 말년휴가를 마치고 부대 복귀하면서 잠깐 얼굴을 봤는데, 네 얘기를 꺼내니까 전차병이면 진짜 군인이라고 하더라. “힘든 건 장비지, 사람은 할 만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겠지. 물론 말은 그렇게 해도, 전차라는 기계가 어디 쉽게 다뤄지는 물건이겠냐. 그래도 적어도 네가 종이랑 펜 붙잡고 있던 나보다 훨씬 더 군인 같아 보인다.

나는 오늘 다시 부대로 복귀한다. 고작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도 이렇게 가기 싫은 걸 보면, 군대라는 건 끝나갈수록 더더욱 싫어지는 곳인가 보다. 웃기지? 휴가 초반에는 그냥저냥 괜찮다가, 끝나면 괜히 아쉬운 마음이 더 커진다.

그때 로션이랑 스킨 필요하다고 했지? 아마 앞으로도 하나둘씩 필요한 게 생길 거다. 그런 거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전화해. 괜히 혼자서 참지 말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줄게.

그리고 이건 꼭 말하고 싶다. 편지 잘 보관해. 내가 보내는 것도, 부모님이 보내는 것도. 지금은 그냥 종이 한 장일지 몰라도, 몇 년 지나고 나면 그게 그 시절의 마음을 다시 꺼내주는 열쇠가 되더라. 웃기지만, 진짜 그렇다.

군대에서 아무리 잘나고 튀어도 결국은 건강이 제일이야. 특히 너처럼 전차 같은 위험한 장비 다루는 사람은 더더욱. 다치는 일 없게 조심하고, 무리하지 말고, 늘 중심 잃지 말고.

오늘은 여기까지 쓰고, 또 편지할게.
조금 늦었지만, 형으로서 해주고 싶은 말들이 계속 생긴다.


2003년 10월 4일
형이.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교육 속에서 무뎌졌던 감정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형이 말한 “힘든 건 장비지, 사람은 할 만해”라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어쩌면 그 말대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차라는 무겁고 위험한 장비 앞에 놓여 있는 지금, 나 자신도 모르게 더 단단해져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형이 말해준 그 한 마디,
“편지 잘 보관해. 지금은 종이 한 장일지 몰라도, 몇 년 지나고 나면 그게 그 시절의 마음을 꺼내주는 열쇠가 되더라.”
그 문장이 이상하게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당장은 먼지 쌓이는 종이 한 장 같아도, 언젠가 그 마음들이 다시 나를 끌어올려줄 거라고 믿고 싶었다.



✒️ 기억의 조각

군대에서 아무리 잘나도

건강한 게 제일이란 말,
지나고 보니 진심이었다.

그땐 그저 종이 한 장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내 마음을 붙잡아 준다.




❤️ 스물한 살, 그 낯설고도 선명했던 시간을

매주 글로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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