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눈이 내리던 날, 따뜻한 내무실에서

내 이름으로 충성한 D+159

by 퇴근 후 작가

부모님께.


어제 편지를 썼지만, 오늘 신병 집체교육 중에 부모님께 편지 쓰는 시간이 있어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집체교육이 시작되었고, 오전엔 각 중대의 행정보급관님들이 오셔서 정신교육을 해주셨습니다. 내무실 안은 따뜻했고, 선임병과 함께 있지 않아 마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내용은 조금 지루했지만, 초병 근무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실감하고 있습니다.


오후부터는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꽤 많이 쌓였습니다.

교육 중이었던 저는 창밖으로 눈이 소복이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선임들이 밖에서 눈을 쓸고 있는 모습을 구경했습니다. 하하, 이렇게 따뜻한 데서 눈을 바라보는 건 오랜만이라 기분이 묘했습니다.

3박 4일 동안은 모든 훈련이 열외라 내일 예정되어 있던 ‘전투준비태세 훈련’도 빠질 수 있게 됐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소식만으로도 이 며칠은 군생활 중 가장 여유롭고 기분 좋은 시간 중 하나일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시간이 끝나고 다시 중대로 복귀하면 눈부터 치워야 하겠죠.

왜 군인들이 눈 오는 걸 그리 싫어하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잠깐이지만 눈 오는 풍경을 마음 편히 감상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아버지는 오늘 같은 날 산에 가셔서 풍경을 감상하셨을 것 같고, 저는 요즘엔 낚시가 하고 싶어집니다.

자대 오기 전에는 축구가 하고 싶었는데, 자대 와서 몇 번 해보니 이젠 조용히 낚시하던 때가 더 그리워집니다. 작년 봄, 친척형과 낚시 가서 쌀쌀한 날씨에 라면 끓여 먹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라면 먹다 물고기 입질 와서 우르르 뛰어가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형은 여전히 바쁘게 일하고 있을 테고, 엄마는 봉사활동으로 하루를 보내고 계시겠죠.

저는 다행히 지금까지 다친 곳도 없고, 큰 어려움도 없이 군생활 잘 하고 있습니다.

선임들과의 관계에도 조금씩 요령이 생기고, 전차 조종수 주특기 공부도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건강하게 전역하는 거니만큼 무리하지 않고, 조심하며 지내려 합니다.


가장 걱정 많이 하고 계실 것 같은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얼굴만 못 볼 뿐이지, 전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밥도 잘 먹고 훈련도 요령껏 받고 있고, 내무생활도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잠도 잘 자고, 정신적으로도 흔들림 없이 지내고 있으니, 우리 가족 모두 건강 잘 챙기시고 웃음 잃지 마세요. 언젠가 제가 문득 집에 돌아가 있을 날이 올 테니, 그때까지 따뜻한 마음으로 저를 기다려주세요.

눈도 많이 왔으니 집에 올라가는 계단이나 빙판길 조심하시고요.


감기 걸리지 않게 꼭 건강 챙기시길 바랍니다.


2004년 1월 12일
아들, 준서 드림


✒️ 기억의 조각 창밖엔 눈이 내리고, 내 안엔 기억이 쌓였다. 군복을 입은 채 앉아 있던 나는, 잠시나마 평화로웠다.




❤️ 스물한 살, 그 낯설고도 선명했던 시간을

매주 글로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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