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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즈폼 Aug 13. 2018

[광복 73주년] 잊혀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독립운동가

8월 15일은 광복절입니다. 광복(빛날 광 光, 회복할 복 復), 말 그대로 빛을 되찾는다는 뜻으로 빼앗긴 주권을 다시 되찾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시작으로 악몽과도 같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었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의 미주리호 갑판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함에 따라 이 땅에도 해방이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의 광복은, 한편에서는 자주적이지 못한 독립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이유는 일본이 우리가 아닌 미국에 항복하면서 이 땅에 광복이 찾아왔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워온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었다는 사실일 텐데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김구 선생, 안중근 장군,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등의 독립운동가 외에도 당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보이지 않는 이곳저곳에서 활약하였고 그 업적들은 이루 설명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번 브런치에서는, 광복절을 맞아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아직 우리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몇 분을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장투쟁의 숨은 영웅 - 최운산, 최진동, 최치홍 형제


1920년 6월, 독립군 연합부대는 중국 지린성의 봉오동 계곡에서 일본군과 싸워 크게 승리하게 되는데, 이가 바로 그 유명한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였다. 하지만, 봉오동 전투에서 크게 기억되어 오지 못한 이름이 있는데, 바로 최운산, 최진동 장군이다.


봉오동 전투에서 직접 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한 것은 최진동 장군인데 이때,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재산을 팔아 독립군을 후원하고 형인 최진동 장군을 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독립군을 지원하는 참모로 활약하였다. 물론, 삼 형제 중 막내인 최치홍 선생 역시 형들과 뜻을 함께 하였다.


이들은 무장투쟁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봉오동사관학교 설립, 무기를 보급하며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등 봉오동 전투 승리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안타깝게도 최운산 장군은 여러 차례 투옥과 고문을 겪다 광복을 40일 남겨둔 1945년 7월 5일 별세한다. 이들의 활동은 이후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과 이후의 무장독립운동에서 큰 빛을 발했다.


최운산(좌), 최진동(우) 장군






하와이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이끈 모녀 – 황마리아, 강혜원 지사


1903년 1월 13일, 갤릭호에는 101명의 한인이 호놀룰루항에 첫발을 디뎠다. 이들은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먼 타지로 온 하와이 이민 1세대이다. 1905년 4월 황마리아 지사도 아들과 딸을 데리고 하와이로 이민해왔다. 이들은 국권침탈의 비보를 먼 타국에서 듣게 되었는데, 황마리아 지사는 이로부터 3년 뒤, 1913년 4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몸담게 된다.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역에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고, 2주 뒤 황마리아 지사는 그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3월 15일에는 하와이 각 섬의 여성 대표 41명을 모아 함께 흰 저고리와 흰 치마를 입고 애국가를 부르며 행진하였고, 4월 1일 대한부인구제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황마리아 지사가 이끄는 대한부인구제회는 하와이에서 열심히 일해 번 돈을 모아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군을 후원하거나 독립운동가들의 가족을 지원하는 등의 사업을 진행하였다. 특히, 황마리아 지사와 부녀자들이 한 푼, 두 푼 아끼고 모아 보낸 돈이 지금 가치로 수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황마리아 지사의 딸 강혜원 지사 역시 미 본토로 건너가 ‘대한여자애국단’을 창설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지원금을 보내 활동을 도왔으며, 강혜원 지사의 남편 김성권 지사 역시 안창호 선생의 공립협회 회원이 되어 국민회 설립을 돕는 등 독립운동을 위해 뛰었다.


황마리아 지사






참혹한 인권유린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다 – 이춘상 투사


전라남도 고흥, 소록도. 1916년 일제강점기 당시 이곳에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를 목적으로 ‘자혜의원’을 설립하게 된다. 하지만 실상은 나병 환자들을 강제로 수용시켰던 곳이다. 소록도의 참상은 4대 원장인 ‘스오 마사스에’가 오고 나서부터 본격적이게 되는데, 그는 자혜의원의 이름을 소록도 갱생원으로 바꾸고 환자 수를 급격히 늘려나가 그 수가 6,000여 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 


물론, 그 목적은 치료가 아닌 강제노역과 갖은 실험을 위해서였는데 이들은 확장공사에 동원되거나 생체실험을 당하였고 감금과 폭행이 일상이었다. 일본이 한참 전시체제에 접어든 1940년 이후부터는 군수 물자 조달을 위해 더욱 심각한 노동착취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렇게 소록도에서 환자들의 인권을 유린한 마사스에는 1940년 8월 20일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매월 20일 환자들로 하여금 동상에 참배를 하도록 하였는데, 이춘상 투사는 이때 활약하게 된다.


1942년 6월 20일. 당시 27세였던 이춘상 투사는 참배를 하던 환자들이 보는 앞에서 마사스에를 저격하였고 마사스에는 후송된 지 한 시간 만에 죽었다. 이춘상 투사는 담담히 체포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꽁꽁 숨겨져 있던 소록도에서 벌어진 끔찍한 만행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이춘상 투사는 1943년 2월 19일 사형집행으로 광복 이전에 눈감고 만다.


소록도 평화공원 내 스오 원장 동상에 대한 설명




아직도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분들이 많습니다. 광복절의 의미를 다시 새기면서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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