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햇살의 쓰다듬

60초 소설 18

by 소요 김영돈

햇살이 산을 쓰다듬으며 마을로 내려온다. 햇살의 손에 닿지 않은 나무 아래쪽은 촉촉하고 연둣빛 순에는 물방울이 떨어진다. 여기서 내가 사는 복사꽃 마을에 도달하는 동안에는 고속도로를 타고 나들목을 빠져나와야 한다. 출발지점에서 시작된 햇살의 ‘쓰다듬’이 30분쯤 지나자 나무밑동 숲들까지 속속들이 스며들어 숲은 연두색 안개꽃처럼 뭉글뭉글 움직이고 산은 능선에서 능선으로 손을 잡고 시골길을 사이에 두고 다시 이어진다. 길목에는 벚꽃이 한창이다. 홧김에 우박이 내리고 눈발이 쏟아졌다. 자연은 결코 사람과 외따로 동떨어져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을사년 4월, 쉽게 물러서지 않는 한기(寒氣)가 내 마음을 닮았다. ‘아스파라거스’ 새순을 꺾어 건넸던 사람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은 지금 요동치고 있다. 그녀의 손으로 빚어진 집은 불가마를 견디고 하나둘 견고하고 단아하게 지어져 마을을 이루고 있다. 북유럽, 서유럽, 뭉크가 머물던 보랏빛 도는 붉은 집, 베르사유 궁전, 한옥, 아 아득한 앙투아네트…. 적막한 어둠 속에 서 있던 집의 아래쪽에 노란 등불 살짝 밀어 넣자 집들이 마을을 이루며 동화처럼 살아난다. 등불이 밀어 넣어질 때 목이 타들어 가고 침을 꿀꺽 삼킨 나는 부풀어 올라 제멋대로 움직이는 혀를 잘라내고 싶었다. 도시를 형성한 집집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고 속삭임은 마을에서 마을로 이어지고 작은 성곽을 지나 외딴 마을 호수를 거쳐 당신의 마음을 한껏 달군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첫 순이예요. 손타지 않게 눈을 감아요. 그리고 준비되거든 입을 벌려요” 향이 콧속으로 흠뻑 들어올 즈음 입을 벌리자 등불을 든 당신의 뽀얀 손과 빛나는 눈과 떨리는 가슴의 요동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온다. 햇살의 ‘쓰다듬’보다 더 따스한 당신의 손을 덥석 잡고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놓아주었다.

마음의 경계가 돌풍 같은 갈등을 일으키며 무너지려 하고 있다. 둑이 무너진다. 불안, 초조, 기쁨, 희열. 생명의 범람으로 경계가 툭 무너져 내린다. 당신의 ‘쓰다듬’으로 말미암아 내가 당신에게 흐른다. 흙을 구워 집을 짓고 그 집에 불을 밝혀 시(詩)로 향하는 당신. 이 마음이 풀어진 물감은 연분홍, 자주에 백옥을 닮아 붓을 쥘 수가 없다. 나의 붓은 당신의 끌이 되어 초벌 앞에 모여선 집마다 벽 무늬를 새기는데.

당신, 당분간 등불을 켜지 말아주세요. 파종기의 몸살이 끝나기 전까지 무늬를 그리다가 벽 한 귀퉁이 우리 마음의 경계가 무너진 자리에 붙박여 오래오래 양손을 아래로 잡고, 여름이 끝날 때까지 입을 맞추겠습니다. 산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쏟아지던 햇살은 지금 숨을 멈추고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2025.4.16. (모가, 마을 산책 중 무명씨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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