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현의 노래

60초 소설 23

by 소요 김영돈

77년을 견디고 살아 5월의 오동나무를 타고 오르다.

꽃향기에 취해 기어가다 그리운 집이 떠올랐다. 그 집을 떠나 오동을 기어오를 때마다 향기가 진동했다. 어느 날 향이 독가스로 변하는 순간, 소화불량이 왔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독이 퍼지고 하늘이 노래지며 숨이 콱 막힌다. 뱃속에 열매 하나가 걸렸다. 즙이 빠져나간 씨, 단단하고 야무져 썩지도 않고 배설도 되지 않는 씨. 일생을 속에서 오르락내리락 내 육신과 영혼을 간섭하던 씨. 씨는 뿌리내리지 못하고 박혀있다. 씨는 점점 딱딱해지고 차돌처럼 견고해졌다. 세월이 약이 아니었다. 차돌이 쇳덩이가 된 것은 '허기'때문이다. 몸은 수많은 것들을 삼켰다. 씨는 반들거리며 장기의 일부가 되었다. 장기로 변한 씨는 통으로 자라 숨통을 막았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이 백지로 변하며 콱 막혔다, 몸부림치다 보면 조금씩 열어주는 세월의 희롱. 그 5월의 어느 날 오후 발을 헛디뎌 오동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중력의 충격에 숨통이 조금 트였다. 감각도 생각도 살아났다. 먼저 개미떼가 몰려와 주둥이와 항문을 물고 늘어진다. 개미를 떼어내려 몸부림쳐 보았다. 다리는 땅에 기어갈 만큼 짧고 팔은 발과 같이 사용했으므로 나는 몸부림쳤다. 물소리가 들린다. 조금만 속도를 내면 물가에 다 달아 모두 흔들어 떼어 내겠어. 다짐하며 몸을 움직였다. 일생을 건 분투였다. 분투에 지쳐 흔들기를 멈추자 벌떼가 날아와 그 지점을 쏘고 물어뜯었다. 씨앗이 머문 그 볼록한 그 지점을 놈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약점을 공략하는 본능적 공세, 당돌한 접근. 온몸이 퉁퉁 부으며 힘이 빠진다. 느낌도 생각도 멀어진다. 시간이 희미해진다. 몸부림은 급격히 느려지고 허리는 우스꽝스럽게 부어 온몸이 무겁다.


'꽃향기 벽오동, 아득한 집 그리고 당신'이 떠오른다.

누군가 안갯속을 뚫고 걸어와 조용히 키스한다. 현은

두 손이 따로 움직이다고 느낀다. 손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두 손으로 당신를 으스러지도록 안고 싶다. 하지만 영혼만이 울퉁불퉁 안절부절못하다. 온몸의 처짐과 기다림과 얼마 남지 않은 죽음 앞에 당신의 눈을 응시한다.


뜯기고 부은 몸에 피가 흐른다. 오랜만에 초록의 피가 흐른다. 현은 77년의 힘을 모아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셔 마중 나온 혀를 삼킨다. 당신은 현의 부풀어 오른 가슴을 손가락으로 조율하며 유두를 퉁긴다. 온몸의 리듬이 조금씩 살아난다. 쇳덩이가 조금씩 녹는다. 씨가 녹으며 오월의 밖으로 나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77세의 현이 벽오동을 오르며 노래한다. 너를 만나고 벽오동을 오르면, 세월은 도끼가 되어 오동을 탈까. 내 허리를 지나 세월을 연주할까.

<2025.0525. 유 후인, 체를치는 정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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