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초 소설 26
나는 들꽃이다.
6월 빛 좋은 능선에 흐드러지게 핀 이름 없는 꽃이다. 이름이 잘 알려져 유명인사가 된 장미 튤립이 부럽지 않은 들꽃이다.
나는 군락을 이루고 사유하며 자유롭게 핀다. 허리나 목이 잘리거나 뿌리 뽑혀 뿔뿔이 흩어질 염려가 없다. 허리가 꺾이고 목이 잘리고 뿌리가 한 줌 뽑혀가도 들꽃군단은 자유롭게 사유한다.
들꽃은 어느 곳에든 뿌리내리고 언제든 피어나지만 그 모습은 6월 초순에 드러낸다. 이맘때면 고향마을 뒷산에는 밤꽃이 핀다. 화려하지 않지만 뭉글뭉글한 설렘을 선사하는 밤꽃.
나는 밤꽃의 튼실함과 솔직함 그리고 음흉한 향이 좋다. 장미를 보고 넋을 놓고 웃던 여인의 눈물을 뚝 멈추게 하는 밤꽃.
오늘나는 알밤 같은 갈색 변비 한 덩이를 항문이 찢어지게 피가 나게 배설하는 욕망을 태연하게 바라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욕망.
누구도 돌아보지 않지만 누구나의 마음속에 만개한 들꽃 근처에는 어김없이 밤꽃이 핀다. 점점 달아오르는 태양을 좇아 칡넝쿨이 슬금 슬금 밤나무숲을 기어오른다. 좀 있으면 자줏빛 칡꽃이 필 것이다. 여름 내내 욕망을 덮어갈 칡넝쿨은 밤나무를 꼭 끌어안고 알밤이 익어 쏟아질 때까지, 무서리가 내릴 때까지 힘을 주고 있을 것이다.
여름 입구에서, 바람이 불면 밤꽃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가슴을 드러내놓고 마음껏 흔들릴 것이다
가까이하면 하찮고 멀어지면 그립고 눈감으면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들꽃이 두서없이 밤나무 군락지를 수놓을 것이다.
나는 오늘 능선으로 밤나무 숲으로
가득 들어찬 개망초, 모나르다, 끈끈이대나무, 들국화, 칡넝쿨, 개량코스모스, 토끼풀의 잔치를 둘러본다.
들꽃을 닮은 사람들이 능선을 덮고 산을 이루고 세상의 빈 곳을 가득 메운다.
장미, 튤립의 꽃잎이 뭇사람들의 손에 한 움큼씩 잘려나가도 들꽃은 죽지 않는다. 자유로운 욕망의 연대를 이길 군대는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2025년 6월 1일부터 걷다가 마침내 당도한 6월 11일, 나의 오두막 언저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