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아우, 영문에게

60초 소설. 33

by 소요 김영돈

그러니까 얼추 55년 전. 기억나기로는 벼꽃이 피기 전이었고, 마당에 멍석이 깔려 있었고, 마당에서 감자를 삶고 있었고 식구들이 집을 떠나기 전이니 4남매에 부모님까지 6명이 모두 있는 날이었다. 마당에 모기가 많아 청솔가지를 피웠고 나는 하늘의 별을 보고 있었고 마당 주변 화단에는 뱀이 살고 있었다. 그날, 아마 네가 갓 돌을 지나던 날 저녁이었다. 식구들이 각자의 일로 분주할 때 너는 안방에 혼자 누워 자고 있었다. 매운 연기 때문에 잠이 깼을 것이다.

‘다들 분주했다.’

네가 기어서 문지방을 넘고, 마루에서 마당에 걸려있는 감자 삶는 양은솥을 보고 있는 힘껏 일어서서 두 발로 걷다가 뜨락에 떨어지고 뜨락에서 마당으로 떨어지는 3초의 시간 동안 ‘다들 분주했다.’ 무엇이 분주했는지는 묻지 마라, 살아보면 사람은 늘 분주하단다. 그땐 차도 없고 자전거도 없고 경운기도 손수레도 없었다. 겨우 동네에 한두 대 소구루마 정도가 있었다. 1970년이니까 생각해 봐라. 한데 그때도 ‘우황청심환’은 유명했단다. 그런데 그걸 사러 갈 시간이 없었다. 약국도 병원도 백릿길 멀리 떨어져 있었다. 네가 입술이 새파래졌을 때 엄마는 익모초를 절구에 빻아 마구 부었던 기억이 얼핏 엉켜서 난다. 그리고 너를 뒷산 상수리나무 우거진 곳 산 정상 근처 텃밭에 묻었다. 그리고 나머지 6명은 55년 넘게 살았다. 아니다 그중 어머니, 아버지, 작은형은 너를 따라갔다. 앞에 두 분은 일찍, 뒤의 형은 좀 늦게 그렇게 떠났지만 모두 50년 남짓 살았다. 나머지는 70대 누이를 기점으로 큰형과 나 이렇게 셋이 살고 있다. 어떠냐고 궁금해할 것 같아 먼저 말하마. 별다르지는 않다. 좋은 일 반 나쁜 일 반 그것도 확실치 않고, 살아서 훨씬 다행이라는 생각도 반반이다. 그저 나쁘지 않은 정도다. 그러니 삶과 죽음이 0인 셈인데, 이건 진심이다. 다행이라는 생각 중에는 네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일들이 꽤 있었다. 가족 간에 일터에 동네에 나라에, 네가 ‘겪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 네가 생각나곤 했었다.

그러고 보니 너에게 처음 보여주는 형의 속내다. 55년 만의 속내, 어떠냐. 네가 살았으면 “............” 그 말은 말자. 다만, 몇 가지 확실한 건 ‘대전최고품’이란 소리를 들었으니 얼굴값을 했을 것이고 한 성미 할 거고,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이 형한테 덤볐을 것이다. 그 확실한 증거로 아들딸이(너에게는 조카가 되겠구나) 나에게 덤빈다. 놀라지 말라 유전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거다. 마치 수명처럼 말이다.


오늘 처음 벼꽃이 피는 걸 보았구나. 평생을 밥을 먹었는데, 벼꽃이 눈에 들어온 것이 처음이란다. 뭐 사는 게 대충 이런 식이다. 문을 닫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도 하고(그건 안 보이고 안 일어난 게 아니고 모르는 거지만), 문만 살짝 열면 거기 셀 수 없는 삶과 죽음이 욕망이 내리쪼인다. 네가 경험했던 죽음도 그 한 발짝 때문이었잖니.

‘그리움, 생의 지향점, 존재 이유, 삶과 죽음의 변주’ 같은 건 글을 쓰는 사람들이나 가끔 상기하는 것들이지 ‘다들 분주하단다’. 형? 이 형은, 소설을 준비하고 있다. ‘팽이의 온도’, ‘60초 소설’ 같은 걸로 소설을 넘보고 있는 거지. 시도해 보니 소설은 사람을 ‘완전히 속여’서 현실감을 망각하게 한 후 감동을 줘야 하는 거더구나. 방부제나 에고 같은 거 집어넣으면 금방 썩은 내가 나서 사람들이 절대로 안 속는다는 것 알게 되었단다. ‘60초 소설’은 완전 라이브였는데 이제는 ‘자연, 나무, 꽃, 뱀, 그리고 훔쳐본 사람’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하물며 너처럼 이 세상에 없는 사람도 느닷없이 쓰게 된다. 내가 살아온 대로 ‘흐름 타기’하려고 한다.

보고 싶은 문아!

거긴 어떠니? 거기도 벼꽃이 피니?


ps. 벼꽃이 필 때, 저녁노을은 절정에 달하곤 했으니.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한 번쯤은 서녘 하늘을 바라볼 터이니. 나는 청자 주전자에 진달래 술을 준비해 두고, 홍어에 묵은지를 듬뿍 썰어놓고 흑산으로 떠났던 친구에게도 기별해 두어야겠다. [2025.0730. 벼꽃이 피는 논두렁에서 동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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